몇 년간 집을 멀리 떠나 있다 돌아온, 내 나이 서른 때 아버님은 내게 묻기 시작하셨다. 내 갔던 그 먼 곳에 대해, 당시 세론에 대해…. 결코 시험이 아닌, 아버님의 순수 질문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웠고, 또 예전과 달라지신 당신에 대해 슬픈 감정도 가졌다.
묻는다는 것. 자기의 모름을 공개하는 것. 난 네 말을 듣겠다는 것. 너를 신뢰한다는 것. 아! 부자 관계에 있어 분수령과 같은 역전 가능성의, 불길한 징조 때문이었다.
● 가르칠 수 없는 부자관계
만화영화 주인공, 호머 심슨도 그랬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한 것은 자신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다고…. 그런데 자기가 아들에게 처음 물은 것은 바트 나이 4살 때였다고…. 미지의 TV 리모컨 사용법에 대해 그는 어린 아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아버지들은 아들들에게 묻고 있다. 인터넷 로그인과 TV 예약과 휴대전화 뮤트 기능에 대하여…. 디카는 무엇을 사야 하는지에 대하여…. 심지어 최근 출고된 자동차 성능에 대하여….
더 이상 아들은 아버지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그네들을 인내로 가르쳐 언젠가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자의 관계는 완전히 도치되었다. 아버지 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어 가르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아버지처럼 권위로 누를 수도 없다.
권위는 가랑잎처럼 말라 바삭거리는 가치일 뿐, 바다와 같은 인터넷 정보망에 깃들어 사는 아들들은 우리의 편린과 같은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여, 늘 검증하고 수정하며 덧붙인다. 그리하여 주말의 명화는 물론 주식 투자, 해외여행, 문화정보 등 과거 경륜 있는 기성세대가 하던 많은 일들이 젊은이들의 몫이 되었다.
게다가 기성세대의 노하우는 테크놀러지에 의해 하나의 간편 기능으로 요약되어, 요리, 세탁, 촬영법, 심지어 음악 편곡까지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알아서 처리한다.
신성했던 선인의 가르침이 단지 정보 제공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는 점점 말이 없어진다. 현실 속에서 말을 하면 할수록 한계가 드러나 더 이상 '과거에는 이랬지…'라는 말만 하게 된다.
● 묻는 것이 안전하고 이롭다
세월이 하도 하수상하여 삶의 강물은 굽이굽이 둘러 흐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직류하고, 낙하한다. '달라야 한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세대들을 단절시키고 고립시킨다. 분명히 세상은 달라졌고 더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더 이상 아들에게 가르치지 말자. 나는 묻는 것이 안전하고 이롭다는 사실을, 또 몰라서 묻기도 하지만 알고도 묻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지를 알고 있다.
세대간의 파트너쉽을 갖는 것. 우리가 모르는 사이 아들들은 변화한 세상 환경 속에서 조숙해졌다. 기성세대 역시 새로운 자기 성숙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자관계만일까? 학교, 회사, 종교, 정치 모두에 해당하는 일이 아닐까?
황성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ㆍ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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