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살아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로구나.”(35쪽)
한사코 동시대적 감각을 잃지 않았던 소설가 박완서(76)씨가 5년 만에 새 산문집 <호미> (열림원ㆍ9,800원)를 냈다. 넉넉한 시선으로 삶의 자락들을 응시하며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질박한 글들이다. 힘 빼고 담담하게 쓴, 그래서 더욱 핍진하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삶의 문장들이 가만히 읽는 이의 마음을 덥힌다. 호미>
작가는 일흔 넘어 쓴 글들로만 묶은 이번 책 서문에 “이 나이까지 건재하다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인데 책까지 내게 되어 송구스럽다”고 썼다. “하지만 이 나이 거저먹은 나이 아니다”라는 그의 조심스런 단언처럼, 책 속엔 겪어내고야 말할 수 있는, 오랜 연륜이 아니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작은 행운과 기적들”이 담겼다.
“내 나이에 6자가 들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꿨지만 요즈음 들어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아마도 삶을 무사히 다해간다는 안도감-나잇값 때문일 것”이라는 작가 자신의 분석처럼, 책은 위로의 속삭임과 격려의 다독임을 한껏 선사한다.
몇 년 째 그는 구리 아차산 자락에 살며 호미로 밭 일구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 그런 그가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걸고 꽃 출석부를 부르며 배운 진리는 다름아닌 “돌이켜보면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는 것.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남들 못지않게 많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가끔 곱씹으면서 지루해지려는 삶을 추스를 수 있는 활력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행복감의 공통점은 꼭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21~22쪽)
그래서 작가는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하”면서도 “내년 봄 살구꽃 볼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시작과 종말의 영원한 순환이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엔 창씨개명, 정신대 동원과 얽힌 일제시대와 궁핍했던 한국전쟁 시절의 아픈 기억, 앞서 간 엄마와 조부, 시어머니 등 가족들과의 아련한 추억도 담겼다. <엄마의 말뚝> 을 비롯한 일련의 소설들 때문에, 엄마보다는 늘 딸의 자리와 더 어울리는 작가는 <휘청거리는 오후> 를 읽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라고 싸늘하게 답했던 엄마의 매몰찬 혹평을 오랜 상처로 기억한다. 휘청거리는> 엄마의>
그리고 이제 엄마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는 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교성 부족한 늦깎이 소설가 엄마를 위해 교복 차림으로 신문사 편집국에 연재소설을 날랐던 큰 딸에게 그는 당부한다.
“만약 엄마가 더 늙어 살짝 노망이 든 후에도 알량한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고 괴발개발 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노망이 될 테니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네가 모질게 제재해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말년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이것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제목으로 실린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딸에게>
책엔 작가가 직접 고른 과꽃, 백일홍, 봉선화 씨앗 중 한 봉지가 책갈피처럼 꽂혀있다. “씨앗 안에 시작과 종말이 담겨 있다”는 작가의 깨달음을 표나게 전하는 선물이다. 그러나 진짜 선물은 시인, 소설가들이 릴레이 하듯 산문집 출간을 이어가고 있는 이 풍요로운 산문집의 계절에도 열매 중의 열매로 빛나는 이 책일 것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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