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역사를 '기회주의가 승리하고 정의가 실패한 역사'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보수 신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 논란이 시사하듯이, 우리는 '기회주의'를 가치 중심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나는 지난해 9월 한국일보에 쓴 '기회주의 공화국'이라는 똑같은 제목의 칼럼에서 기회주의는 급격한 변화와 역동성의 산물로 달라진 상황에 빨리 대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기회주의라는 용어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용법으로 쓰지 말고 그 뜻을 제대로 알고 명암(明暗)을 동시에 살피자는 뜻이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반대편에 있다가 우리편으로 오면 '투철한 성찰'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걸 기회주의라고 욕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편에 있다가 반대편으로 가면 그건 기회주의라고 비난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 명분이 신의를 누르는 사회
기회주의는 행태적 개념이다. 그간 했던 약속과 언행을 뒤엎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게 기회주의다. 왜 자신이 달라져야 하는지 누구든 납득할 수 있게끔 성실한 해명을 한다면 달리 볼 수도 있겠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민주당을 계승ㆍ발전시키겠다는 말을 수십번 했고, 맹세 의례로 광주시민들에게 큰절까지 했었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 자신의 공언을 완전히 뒤엎었다.
그럼에도 내세운 '명분'이 국민적 호응을 얻어 뜨거운 박수까지 받았다. 반면 노 대통령의 배신을 비난한 민주당의 '배신론'은 국가경영과 정치가 무슨 사소한 인간관계의 문제냐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즉, 우리는 내용만 좋다면 기회주의에 대해 아무런 반감을 갖고 있지 않은 국민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 역사의 격랑을 거치면서 갖게 된 습속이나 체질인 것 같다. 우리는 말로는 신뢰ㆍ신의의 중요성을 외치지만, 실은 그걸 사소하게 여긴다.
명분만 좋다면 신의를 깨도 좋다는 게 다수 국민의 정서다. 물론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한나라당이 대선 후보들의 경선 승복 다짐 대회를 이미 두 번이나 열었다는 걸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신의를 깬 사람들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화려한 거대담론으로 포장하려고 애를 쓰긴 한다. 그런 거대담론 중의 하나가 바로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아는가? 간단하다. 무조건 내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꾸미면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이라는 개념 자체에 냉소를 보내는 건 아니다. 한국사회에 썩은 구석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걸 대대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그 어떤 거대담론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절차와 방법론이 기회주의적일 경우 사회적으로 '수익'보다는 '비용'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또다른 기회주의에 의해 응징을 당하는 부메랑을 불러 온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현 열린우리당 사태는 이미 창당 때부터 예견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는지도 모른다.
● 한국인의 숙명인가
속설과는 달리, 기회주의의 주체는 정치인이 아니다. 유권자들이 신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면, 누가 감히 기회주의 노선을 걸으려 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유권자는 성역으로 모시는 오랜 습속 때문에 정치인들에게만 돌을 던지는 데에 익숙하다. 그 돌도 일관되게 던지면 효과가 있을텐데,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기회주의 원리의 지배를 받으니 그게 문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방향의 기회주의면 '창조적'이라고 칭찬하고 나쁜 방향의 기회주의면 '파괴적'이라고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이니, 이래저래 기회주의는 계속 꽃을 피울 수밖에 없다. 이제 어느덧 기회주의는 한국인의 삶의 조건이요 숙명이 되었다. 우리가 자랑하는 '빨리빨리''쏠림''소용돌이' 현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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