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은 철 지난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민중미술의 기세가 꺾인 지 오래, 요즘 부쩍 활황인 미술시장에서도 찬밥 신세인 걸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 시절 맹렬하게 활동하던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 시대의 정열과 분투가 이렇게 잊혀져도 좋은 것일까.
가나아트센터에서 2일 시작하는 민중미술전 ‘민중의 힘과 꿈’은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오윤을 비롯해 강요배, 김봉준, 민정기, 박불똥, 신학철, 이종구, 이철수, 임옥상, 홍성담, 황재형 등 23명의 대표작 100여 점으로 민중미술의 역사성과 작품성을 다시 조명하는 전시다.
이 전시는 한 수집가의 열정 덕분에 가능했다. 전시작 모두가 조재진(61)-박경임(57) 부부의 소장품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조씨는 강원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박수근의 유화 <빈 수레> 를 기증했고, 추사동호회 회장으로 추사의 유배지였던 제주에 추사의 간찰(편지)을 기증하는 등 꽤 알려진 수집가다. 빈>
부부는 지난 30년간 항상 수요일이면 화랑과 고미술상을 순례하며 미술품을 수집했다. 부부가 사는 집 이름을 딴 ‘청관재 컬렉션’은 조선시대 그림과 서예, 민예품부터 김환기, 이응로, 이상범 등의 근현대 회화까지 두루 망라하고 있다. 그 중에도 민중미술은 고암 이응노의 작품, 조선시대 민화와 더불어 부부가 가장 아끼는 것이다.
부부가 민중미술 컬렉션을 시작한 80년대 중반은 민중미술이 군부의 탄압에 시달리고, 한편으로는 ‘거칠고 도식적’이라는 기존 미술계의 비판에 부닥쳐 악전고투하던 시절이다. 그때부터 미술평론가로서 작품을 소개하다가 조씨 부부와 친해진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조씨 부부는 민중미술의 이념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민중미술의 예술성과 진정성을 일찍이 알아보고 인정해준 고마운 지지자”라고 말한다.
“최루탄 냄새 속에 작품이 압수돼 가는 것 보면서 하나씩 모은 작품들입니다. 주변에선 다들 왜 그런 빨갱이 그림을 사냐고 했죠.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 작가들이 빨갱이는 아니잖습니까. 민중미술 작품을 산 것은 서민들 삶의 애환을 나누고 시대를 반영하는 그 작품들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투자 가치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어요.” (조재진 사장)
“그림이 살아있다고 할까요. 민중미술에서는 기운생동이 느껴집니다. 남편이 10여 년 전 큰 수술을 받고 두 달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고 링거로만 버틴 적이 있는데, 그때 병실에 고암의 작품과 민중미술을 걸어둔 일도 있어요. 남편이 그걸 보면 힘이 난다고 해서.”(부인 박경임씨)
부부는 미술 그 자체가 좋아서 웬만한 전시를 놓치지 않고 감상해왔다. 조 사장이 늘 갖고 다니는 낡은 수첩은 연필로 빼곡하게 써놓은, 봐야 할 전시회 목록과 화랑 전화번호 등으로 빈 틈 없이 새까맣다. 부부는 둘이 다 좋다고 할 때 작품을 산다. 사업하느라 바쁜 남편은 가슴으로 보고, 아내는 미술관과 박물관의 강좌를 들으며 머리로 공부해서 함께 안목을 키워왔다. 돈이 생기면 일단 미술품부터 사느라 살고 있는 집 말고 부동산이 없다.
민중미술의 시대는 끝났다는 진단에 조씨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았다고 보여주는 게 이번 전시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80년대는 정치 문제가 압도적이었지만, 지금은 남북한, 외세, 빈익빈 부익부 현상 등 그때보다 더 다양한 이슈들이 있지요. 민중미술을 했던 많은 작가들이 오늘의 이슈를 다루는 작업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는데, 상당수가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선 듯 보여서 안타깝고 애가 탑니다. 시대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도 작가의 임무 아닙니까.”
이번 전시는 컬렉션 공개에만 의의를 두고 있어 작품을 팔지 않는다. 전시는 19일까지. (02)720-1020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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