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을 받은 사람은 유죄, 준 사람은 무죄?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범행의 주체만 다를 뿐 범죄 내용은 동일한 데도 선고가 엇갈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는 퇴임 후인 2003년 4월 김재록 ㈜인베스투스글로벌 대표에게서 사무실을 무상 제공받은 혐의로 지난달 12일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사무실을 제공한 김씨는 지난달 16일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받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두 재판부는 모두 “정씨가 사무실을 제공 받은 것은 퇴임 후의 일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뇌물수수 및 뇌물공여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무실 제공에 대한 의사를 표시하고 약속한 부분에 대한 판단은 달랐다. 형법 제129조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기로 약속한 때에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으며 형법 제133조는 뇌물 공여 의사를 표시한 사람도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장성원 부장판사는 이 규정에 따라 정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장 판사는 “검찰이 ‘정씨가 퇴임 전 김씨로부터 사무실을 제공받기로 약속했고, 퇴임 후 받았다’고 기소했으며, 실제 정씨가 퇴임 전 사무실을 제공받기로 약속한 것으로 판단해 유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씨를 심리한 형사합의23부 문용선 부장판사는 “재판 도중 변호인이 뇌물공여 의사 표시 부분도 기소한 것인지 물었고 검찰은 공여죄로만 기소한 것이라고 답변했다”며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뇌물공여 의사표시 부분을 심리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무죄 배경을 설명했다.
검찰은 “뇌물공여로 기소했다면 그 전 단계인 의사표시 및 약속 부분도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 내부에선 변호인 측이 이의를 제기한 이상 공소사실에서 제외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많아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박상진 기자 okom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