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제 때가 있다. 아무리 좋은 발상도 적당한 시점에 나와야 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선거판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구조 개헌을 제의했다.
이 상황, 이 시점에서는 개헌 찬반과 관련된 어떠한 논의도 정파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적어도 그런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대한 비판은 그 내용보다 그 시점의 부적절함에 대해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다 이제는 한명숙 국무총리의 개헌지원기구 지시가 너무 성급한 것이라는 시점 논란을 낳고 있다. 한 총리는 대통령의 개헌 추진을 행정적, 법률적으로 뒷받침할 범정부 차원의 지원기구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관련 부처들이 참여할 뿐 아니라 학계, 정계,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대규모 기구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지시는 몇 달 후 개헌이 확정될 경우에 한해 나와야 옳다. 현 시점에는 적절하지 않다.
행정부의 역할이 정책 결정보다 정책 집행에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국민의 대표자들이 정치권에서 결정한 사안을 충실히 집행하는 역할이다.
개헌과 관련해서 보자면, 대통령이 발의한 후 국회에서 논의ㆍ표결을 거쳐 국민투표로써 확정될 경우 행정부는 범정부 차원의 기구를 만들어 정확하고 확실하게 개헌을 집행해야 한다. 만약 국회 표결 혹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된다면 행정부의 집행 역할은 불필요해진다.
우리 헌법의 개헌 절차가 보여주듯이, 개헌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것으로서 그 결정 주체는 대통령, 국회의원, 국민이라는 민주정체의 삼자(三者)이다. 개헌 여부의 정치적 결정 단계에서부터 미리 행정부 전체가 동원되면 헌법정신에 어긋난다.
물론 행정국가 모델이 공고화된 현대에는 행정부가 복잡하고 전문성을 요하는 정책사안과 관련해 결정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헌법은 법률이나 행정명령과는 다른 가장 기본ㆍ근본이 되는 사회규칙이다.
그 개정과 관련해 복잡한 전문성보다는 국민과 국민 대표자들의 상식적 판단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개헌 결정은 민주정체의 정치적 토의ㆍ결정에만 의존해야지 행정 공무원이 관여해선 안 된다.
행정부 부처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개헌, 그것도 대통령 4년 연임제 및 대선ㆍ총선 동시선거제라는 민감한 권력구조 개헌이 정치적 사안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헌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상 범정부 차원의 개헌지원기구가 만들어져 행정부가 동원된다면 되겠는가.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하고 의원과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소속 측근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무총리와 장관이 청와대 비서관일 수는 없다. 엄정하게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각 부처장을 대통령을 보좌하는 정치적 직으로 혼동해선 곤란하다.
현 정권이 일견 탈권위적이지만, 행정부 중심 사고는 여전한 것 같다. 정치권의 결정을 집행하는 데에 전념해야 할 행정부가 개헌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전면적으로 나서겠다면 본분을 망각한 행정부 중심주의ㆍ만능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행정부는 개헌 논의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 조용히 지켜보며, 통과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집행 실무를 공부하고 있어야 한다. 현 시점에 개헌 통과를 돕겠다고 범정부적으로 요란스레 떠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임성호ㆍ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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