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년 단임 대통령제’ 도입 이후의 세 전직 대통령은 임기 말 레임덕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가 노무현 대통령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민심, 차기 대선 주자들의 차별화에 못 이기는 척 순응했고, 대선에 대한 개입 의지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정한 대선관리’나 ‘초당적 국정운영 전념’ 등을 앞세워 조용히 지냈다.
차기 대선, 퇴임 후 등을 의식해 ‘작전상 후퇴’를 한 셈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임기 1년여를 남긴 시점에 진승현, 정현준, 이용호 등 각종 게이트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에 여당 내 개혁파의 동교동계 공격까지 보태져 2003년 11월 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이어 집권 마지막 해인 2002년 초로 넘어와 세 아들의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심한 레임덕에 빠졌다.
DJ는 대선의 해인 2002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선 불개입을 선언했다. 이어 대선을 7개월 앞둔 5월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말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해로 넘어가기 직전인 1996년 12월 26일 새벽 노동법의 국회 기습 처리를 계기로 레임덕에 빠져들었다. 이는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97년 벽두에는 한보 사태가 터져 측근 비리사건으로 번졌다. 급기야 차남인 현철씨가 구속되면서 국정을 이끌 동력을 상실했다.
YS는 1997년 연두 회견에서 DJ와 달리 “당 총재로서 분명한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고 당내 대선후보 경선개입 의지를 비쳤으나, 상황은 정반대로 굴러갔다. 이회창 후보측의 차별화 공세에 시달리다 대선 직전인 11월 신한국당을 탈당해야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사돈 기업인 SK에 이동통신 사업 특혜를 주려 한다는 의혹 때문에 당 안팎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 부동산 폭락 등 경제난도 닥쳤다. 당내 2인자인 YS의 압박을 받으면서 국정 장악력도 급속히 떨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탈당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현승종 중립내각을 구성하고 야당 후보인 DJ와 청와대 회동을 갖는 등 야당 달래기에도 나섰다. 정치권에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레임덕의 장막에 숨어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가 공공연하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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