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늦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던 그 시기, 당시 영남대 교수였던 유홍준(58) 문화재청장은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해 5월 출판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가 폭발적 반응을 얻으면서 인터뷰와 답사 강연 요청이 줄을 이었고 전화, 편지, 방문객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책은 출판되기가 무섭게 초판 2만부가 팔리며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 뒤에 나온 2, 3권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220만부 정도가 판매됐다. 책의 대중성만큼은 이 같은 수치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그렇다면 작품성은 어떨까. 나의>
작가 박완서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읽고 깨우친 바 기쁨이 하도 커서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다”며 약간은 호들갑스런 반응을 보였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시인 박노해가 “ 제 눈을 맑게 열어준 운명 같은 글, 펼칠 때마다 선방의 죽비처럼 내 등짝을 때리는 글”이라고 찬사를 보낸 것을 보면 작품성 역시 부인할 수 없었다. 비슷한 성격, 혹은 비슷한 구성의 답사 책이 그 뒤 여럿 나왔지만 내용의 다양함과 깊이, 감동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를 넘어선 책을 찾기는 어렵다는 게 출판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나의>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제1권 머리글에 나오는 이 말은, 책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 문화유산이 가득한데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보고 감상할 수 있는 눈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남도답사 일번지’라 부른 전남 강진과 해남을 시작으로 전국의 문화유산을 찾아가고 거기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그곳에 깃든 사연을 풀어놓는다. 저자의 감상이 보태지고 추억이 더해지면서 한편의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
1권은 1991년 5월부터 월간지 <사회평론> 에 연재한 것을 중심으로 했다. <사회평론> 에는 박호성 안병욱 조희연 최재현 교수 등 지인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그는 “돈벌이가 어려워 망할지 모른다”며 창간을 만류하다 도리어 편집위원이 된 인연으로 글을 썼다. “몇 번 연재를 하다가 한번 빼먹었더니 독자 항의가 많았다고 해요. 한번 더 펑크를 내자 미국에 있는 독자가 ‘혹시 필자가 죽은 것 아니냐’고 물어왔답니다. 제 글이 제법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회평론> 사회평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가 출판됐을 때, 전통적인 기행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술서나 역사서라 할 수도 없어 도서 분류가 애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같은 일반적 분류를 넘어 인문서와 기행서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를 저자는 “고급스러운 내용을 대중적인 형식으로 전하려 했다”고 말한다. 나의>
책을 읽으면 그가 말하는 대중적인 형식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자칫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어떤 독자가 읽어도 소화할 수 있게 쓴 것이다. 적어도 사용하는 어휘가 어렵다거나 문장이 난해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는 없다. 게다가 쉽기만 한 게 아니라 문장이 편하고 정겨우며 때로는 드라마 같다. 저자는 “단편소설처럼 기승전결식 구조로 썼다”고 나름의 작법을 설명했다.
단순한 문화재 소개서라면 재미가 덜했을 것이다. 문화재에 얽힌 사연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본이요, 때로는 저자와 가족, 친구, 제자가 나오고 때로는 맛난 식당과 여관 집, 답사 현장에서 만난 정겨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태진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전시회에서 여학생을 만나 수작을 부려 통성명을 한 뒤 고향을 물어보는 대화(그 여학생이 지금의 부인이다)에서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마주보는 군인과 여학생의 풋풋한 얼굴이 그려진다. 대기업에 다니는 동생 부부와 서산 마애불을 다녀오는 광경에선 따뜻한 형제애를 보여주는데, 그 중 한 장면을 책은 이렇게 썼다. ‘초가을 장난기 있는 보드라운 바람이 모자를 날리고 머리채를 흔들어 놓으니 그것이 또 웃음을 자아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피해 다니며 사진을 찍게 한다. 나는 제수씨가 어려워 웃음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데 아우는 버젓이 제 형수를 껴안고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다.’
책(1권)은 심지어 개 이야기까지 담았는데 그 역시 재미있다. 강진 무위사의 게으름뱅이 누렁이는 답사객이 오든 말든, 불자가 오든 말든 양지 바른 곳에 엎드려 눈꺼풀만 잠시 들었다가 감아버린다. 반대로 해남 유선여관의 노랑이는 무척 부지런해서 자기 집 손님의 거동을 살피고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로 그려진다. 97년에 나온 3권에는 두 녀석의 나중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는데, 무위사의 누렁이는 세상을 떠났고 유선여관의 노랑이는 1권을 읽은 답사객의 지나친 관심으로 대인공포증이 생겼다고 적혀있다. 다시 유 청장에게 물어보니 무위사에는 지금 누렁이의 손자가, 유선여관에는 노랑이의 자식이 있는데 핏줄을 속일 수 없는지 한 녀석은 능구렁이고 다른 녀석은 부지런히 손님을 안내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1권은 재미있는데 2, 3권은 재미가 덜하고 좀 어렵다는 독자가 있다. 유 청장은 “1권은 문화유산을 보는 시야를 터주는데 주력했고, 2권은 깊이 있는 눈으로 문화재의 내면을 보도록 했으며, 3권은 문화재를 미학적으로 접근하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절묘한 출판 시점이 거론된다. 93년은 사회적 이슈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민족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좌우 성향 차를 넘어 이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자동차 보급이 크게 는 것도 이 때쯤인데, 운전자들이 어디론가 달리고 싶을 때 이 책은 훌륭한 가이드가 됐다. 나의>
하지만 책이 나온 뒤 유 청장은 답사 강연을 하느라 육체적으로 무척 고달팠다고 한다. 문화유산 전도사를 자처한 그는, 믿지 않는 사람도 설득해야 하는 ‘전도사’처지에 이제 책을 읽고 믿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낸 창비에서 마케팅을 담당한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그의 저서 <열정시대> 에서 출판 이후 한 1년 동안은 이틀에 한번 꼴로 강연을 했다고 전했다. 열정시대>
어쨌든 책이 나온 뒤 한동안 답사 붐이 일었다. 답사객들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권을 들고 현장에서 그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으며 책에 나온 곳을 일부러 찾아 잠자리를 청하고 음식을 먹었다. 그런 인연으로 유 청장은 명예전남도민, 명예강진군민, 명예안동시민이 됐고 경주시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게다가 책 내용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고 연세대 입시 문제에 인용됐으며 일본에서도 출판됐으니 저자로서는 더 할 수 없는 영광을 얻은 셈이다. 나의>
하지만 책 든 여행자가 몰리자 뒤늦게 관광에 눈 뜬 자치단체가 절 집 앞에 주차장을 만들고 길을 내는 바람에 호젓한 분위기가 망가진 곳이 많아 그도 가슴이 아프다. 유 청장은 “절 집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가장 좋은데 걷지 않고 차를 타고 가면 감동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안타까워 했다.
독자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유 청장은 추가로 4, 5권을 쓰고 싶다고 한다. 당장은 문화재청장 일이 우선이지만 여유가 생기면 아직 다루지 못한 서울 경기 충북 제주의 문화유산을 따로 소개하겠다고 한다. 이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독자의 높아진 수준에 완벽하게 맞출 수 있을 지 좀 고민스럽다고 했다.
■ '전 국토가 박물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숱한 유행어 낳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는 책으로는 드물게 유행어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유홍준 청장이 한 말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이 책에 인용돼 널리 알려진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느냐는, 다소 막연한 질문에 대한 유 청장의 답변이다. 예술을 보는 눈은, 아무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의>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은, 유 청장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관계자로부터 한국의 박물관 실태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해준 대답이다. 오랫동안 같은 땅에서, 같은 혈통끼리, 같은 언어로, 같은 제도와 풍습을 갖고 살았기에 어디를 가도 유ㆍ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조선 정조시대의 문인 유한준이 김광국의 수장품에 부친 글이다. 문화유산을 사랑하면 가끔 그것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데, 그 목소리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들을 수 있다는 뜻에서 인용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의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는 2, 3권에 거푸 등장한다. 힘껏 때릴수록 종소리가 멀리 퍼지듯, 독자의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책에 더 많은 이야기, 더 다양한 해석을 담겠다는 저자의 다짐이다.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는 퇴계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죽음을 앞둔 말치고는 다소 허탈하기도 하고 반대로 오묘한 뜻이 있는 것도 같지만, 매화를 유난히 사랑한 퇴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유홍준 약력
1949년 서울 출생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1980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4년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1991년 영남대 회화과 교수 및 영남대 박물관장
2002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2004년 문화재청장
저서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완당평전> 등 완당평전> 화인열전> 나의> 정직한> 다시>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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