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대중에게 ‘카타르시스’(정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대중매체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미국 사회학자 토드 기틀린은 “만약 액션 영화가 카타르시스를 준다면 폭력, 범죄는 잔인한 영화 상영이 증가한 지난 몇십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을 것”이라며 “(다른 이유로) 최근의 범죄율 하락이 있기까지 수십년간 범죄율은 하락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프로이트의 카타르시스 이론(인간은 공격을 표현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이론)에 대한 반박인 셈이지만, 대중매체가 사람과 상황에 따라 카타르시스 기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선으로 제한을 달면 문제될 건 없겠다.
● 대화ㆍ타협보다 직설ㆍ자극 선호
바로 그 ‘사람과 상황’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론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중매체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카타르시스 기능이 발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은 매우 감성적이며, 역사적으로 맺힌 한(恨)이 많은데다, 잘 살아보겠다고 허리끈을 바짝 동여매고 일하는 바람에 세계 최고 수준의 스트레스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한을 달래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에 관한 한 한국 대중매체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대중의 속을 일시적으로나마 후련하게 해 준 공은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늘도 있다. 무엇보다도 ‘카타르시스의 상례화’가 가장 큰 문제다. 주제와 상황에 따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건 필요하거니와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모든 일에 대해 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거나 그게 관행으로 정착되면 정상적인 공론장 형성이 어려워진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위축시킨다는 뜻이다. 그 어느 일방의 속을 후련하게 해 주는 대화와 타협은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타르시스 지향성은 여운과 여백을 추방한다. 직설과 자극을 선호한다. ‘드라마틱’하고 ‘오버’하는 경향이 농후해진다. 이는 언론이 고정 수용자를 확보하고, 대중문화 상품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대중매체의 동원 기능도 극대화돼 ‘쏠림’과 ‘소용돌이’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카타르시스는 ‘다이내믹 코리아’의 원천이다. 문제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역동적으로 살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이면은 ‘이전투구(泥田鬪狗)’다. 모두 다 확신과 정열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타협이나 양보는 어렵다. 편 가르기는 기본이다. 승자 독식주의는 당연한 귀결이다. 한 맺힌 패자(敗者)가 양산된다. 이는 다시 카타르시스의 잠재적 효능을 높여줄 토양이 된다. 카타르시스는 한과 스트레스라는 밥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어찌 대중매체 뿐이랴. 정치인도 카타르시스 제공을 잘 해야 인기를 누릴 수 있다. 이는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포퓰리즘과는 다르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는 동시에 나쁜 점도 있다. 파국으로 가진 않지만, 위선과 불신의 만성화는 피할 수 없다.
● 대선, 또 카타르시스 축제에 그칠까
선거는 사실상 ‘카타르시스 축제’다. 후보들의 공약(空約)에 속는 줄 뻔히 알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뜨거운 열기가 온 나라를 뒤덮는다. 책임윤리는 없다. 대중도 그걸 따지지 않는다. 속만 후련하면 그걸로 족하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오래 가진 않는다. ‘기대-실망-환멸’의 순환은 세계 모든 나라의 유권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것이긴 하지만, 한국은 유난히 그 순환 속도가 빠르다. 그런 상황에서 성찰은 사치다.
비전은 불가능하고 그때 그때 밀어닥치는 파도에 몸을 실어야 한다. 사회정의 실현은 근시안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 과오와 기만에 대한 책임추궁과 응징은 없다. 그게 바로 카타르시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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