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의 1초. 찰나의 순간에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다. “스타트가 조금만 빨랐더라면”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100분의 1초를 단축하고자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붓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그들에게 반 박자 빠른 출발은 희망이자 목표다.
제6회 창춘 동계아시안게임에 출전할 국가대표 가운데 유일한 고교생인 고병욱(17ㆍ불암고). 청각장애인(2급)인 그는 생후 23개월부터 보청기 없이는 굴착기나 대형트럭의 굉음조차 듣지 못한다. ‘탕’하는 총성이 잘 들리지 않아 출발이 늦은 경우도 허다했다. “총성을 못 들으면 어떻게 스케이트를 타겠냐”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는 왜 500m에 약해야만 하냐”고 어머니에게 하소연할 때도 많다.
출발이 느린 고병욱은 단거리 대신 장거리를 선택했다. 지구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 그는 지난달 전국종목별빙상선수권대회 남자 5,000m에서 자신의 최고기록(6분59초81)으로 생애 첫 국가대표가 됐다. 장애인이 국가대표가 된 건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최초의 일이다. 고병욱은 최근원(25ㆍ의정부시청), 여상엽(23ㆍ한체대)과 함께 동계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21일 태릉 국제스케이트장에서 만난 고병욱은 왼쪽 가슴에 붙은 태극기가 자랑스러운지 마냥 싱글벙글했다. “국가대표가 되니 좋으냐”고 묻자 머리만 긁적였고 카메라 렌즈가 자신을 가리키자 “쑥스러운데 꼭 찍어야 해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곧 “제가 국가대표가 됐다고 학교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붙었어요”라며 자랑했다.
고병욱의 아시안게임 목표는 동메달. 고병욱을 지도하는 김병기 코치는 “심폐 능력과 지구력이 탁월해 발전 속도가 남다르다”면서 “아시안게임보다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이 더 기대된다”고 귀띔했다. 단점은 큰 키(188㎝)에 비해 빼빼 마른 몸(70㎏). 몸이 가냘퍼 직선주로에서 속도가 떨어진다. 그래선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입이 툭 튀어나왔다.
고병욱은 태릉선수촌에 입촌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국가대표가 되면 (최)근원이 형이랑 선수촌에서 함께 운동할 줄 알았는데….” 5,000m 국내 최강자 최근원 등이 동계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해 합동훈련이 무산됐다. 홀로 집에서 태릉을 오가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고병욱은 밤마다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5,000m 우승자 채드 헤드릭(30ㆍ미국)의 동영상을 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랜다.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나가는 거예요. 메달 욕심보다는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할래요.” 꿈은 크지만 서두르지 않겠다는 고병욱.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조숙했다.
이상준 기자 j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