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닫힌 한국은행 철제 정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온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다. 요란한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쏟아진 “소감이 어떠냐” “몸 상태는 어떤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굵직한 사건이 터졌을 때 대검찰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서울 남대문 앞 한국은행에서 재연됐다. 새 1만원권과 1,000원권 지폐가 처음 유통된 22일 오전 11시, ‘AAA0010001’번이 찍힌 1만원권을 받아 든 이모(50)씨는 “1번 순서를 지켜낸 사흘이 10년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19일 밤부터 은행 앞에서 버텼다고 했다.
●‘돈 된다’ 신권 쟁탈전
한국은행 화폐교환 창구는 ‘돈 되는’ 지폐를 차지하려는 쟁탈전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일련번호가 빠른 지폐는 수십 배를 받고 되팔 수 있다”는 소문에 2, 3일 전부터 발디딜 틈이 없던 교환창구 앞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업무 시작 시간인 오전 9시 30분, 뒷줄의 시민들이 한꺼번에 앞으로 몰리면서 창구는 난장판이 됐다. 앞줄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번호표에 대해 뒷줄 시민들이 “누구 마음대로 순서를 정하느냐”며 따진 게 발단이 됐다.
청원경찰 60여명과 경찰 200여명이 싸움을 뜯어 말린 뒤에도 이들은 욕설을 주고 받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렇게 2시간 가까이 ‘돈’을 놓고 싸웠고 교환 업무는 완전히 마비됐다. 결국 한국은행이 “번호표를 가진 200명은 1인당 90만원(총 1만8,000장)까지 교환하고 나머지 지폐(2,000장)는 1인당 10만원씩 바꾸자”는 중재안를 내놓자 이들의 싸움은 끝났다. 한 번에 10명씩 삼엄한 경비 속에 창구로 들어가는 시민들의 표정은 득의만만했다.
신권화폐 가치에 대한 견해는 엇갈린다. A수집업체 관계자는 “‘0000001’이나 ‘1234567’처럼 특별한 번호는 몰라도 일련번호가 앞선다고 희소가치가 높은 건 아니다”고 말했다.
●1만원권 혼천의 中서 수입기술 논란
새 1만원권 지폐 뒷면 바탕 무늬로 들어간 혼천의(渾天儀)가 우리의 과학 창조물이 아니라는 비판도 빗발친다. 뒷면은 국보 제230호인 혼천시계의 일부분인 혼천의와 조선시대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보현산 천문대 천체 망원경’을 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혼천시계는 서양식 톱니시계 장치와 절기ㆍ계절을 표시하는 동양의 혼천의를 결합한 독창적인 우리 기술이지만, 혼천의만 떼어 놓으면 중국에서 수입된 기술”이라고 지적했다. 한은 관계자는 그러나 “도안에 사용된 혼천의도 그 중앙에 지구의가 들어있는 등 중국 것과 다른 독창성을 갖추고 있다”며 “자동차가 처음 서양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현재 한국산 자동차는 독창성이 없는 것이냐”고 반박했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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