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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위기보다 무서운 불감증

입력
2007.01.2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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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 취재를 위해 처음으로 미국 땅, 그 중에서도 뉴욕 맨해튼에 도착했을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하늘을 뒤덮은 마천루 빌딩숲이 아니었다. 타임스퀘어 일대 곳곳에 걸려 있는 일본 소니사의 거대한 광고판과 전자상점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워크맨' 카세트의 물결이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한 손에 장악한 소니의 막강한 위상을 보면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는 소니 대신 삼성의 로고와 애니콜 휴대폰이 차지하고 있다.

다시 10 년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수생활을 하던 시절 차를 몰고 인근 지역을 지나다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낙서로 가득 찬 담벽 사이사이 흉가처럼 버려진 주택들과 유리창이 모두 깨져버린 낡은 건물들, 한 마디로 유령도시가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이 곳에 있던 로버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은 탓이라고 했다.

1950년대 초반까지 영국 자동차산업은 세계 최강이었다. 롤스로이스, 랜드로버, 재규어 같은 최고급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 1위의 자동차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명맥을 이어온 로버사가 지난해 사실상 간판을 내림으로써 영국의 자동차회사는 멸종했다.

● 흔들리는 한국경제 주력상품

어느 누구도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는 것이 기업의 세계다. 20년 뒤에도 삼성이 맨해튼 거리를 지킨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10년 뒤 무엇으로 먹고 살지를 생각하면 밤잠이 오지 않는다"는 어느 재벌총수의 말이 결코 엄살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런 경계심이 과도한 탓일까. 새해 벽두부터 들리는 산업계 뉴스들이 심상치 않다. 1980년대 후반 한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주고 절치부심해 온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최근 삼성전자를 앞지르는 제품을 하나 둘 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한국이 몇 발짝 앞서 있지만 일본의 추격속도가 범상치 않다.

요즘 한국경제는 몇 개 제품이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10대 수출품목 리스트를 보면 안다. 1위 반도체(구성비 10.2%), 2위 자동차(10.1%), 3위 무선통신기기(주로 휴대폰, 8.3%), 4위 선박(6.8%) 순이다. 순위로는 7위지만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또 다른 효자제품이 평판디스플레이다.

그런데 이들 주력 상품이 위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여건이 좋지 않다. 휴대폰 산업은 이미 지난해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다. VK, 팬택 같은 중견 업체들이 경영난에 빠졌고, 세계 4위인 에릭슨이 매출면에서 3위인 삼성전자를 제쳤다는 외신보도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LCD로 대표되는 평판디스플레이 업계도 지난해 국제적인 공급과잉과 경쟁심화로 가격이 급락하면서 사상 최악의 실적을 보였다. 자동차 역시 환율하락에 따른 경쟁력 약화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 위기의식 실종된 현대차 노사

그렇다고 한국경제의 미래가 어둡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기업과 업계가 그런 난관들을 돌파해나갈 의지와 능력이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위기를 인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빠질 확률은 그만큼 낮아진다.

문제는 위기에 둔감하거나 위기를 알면서도 대처할 의지가 없는 경우다. 최근 현대자동차의 파업사태를 보면서 국민들이 불안하고,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위기의식의 부재상태로 의심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 자동차시장 경쟁이 얼마나 잔혹(brutal)한지 노사가 깨닫고 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대차 사태에 대해 닉 라일리 GM 아시아태평양 사장이 내뱉은 이 한마디가 문제의 핵심을 대변한다.

회사의 발목을 붙잡고 제 배만 채우려는 노조, 여기에 원칙 없이 끌려 다니기만 하는 회사. 그 노조에 그 회사다. 1970년대 극심한 노사 대립으로 몰락을 더욱 부채질한 영국 자동차업계의 불행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노사 모두 정말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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