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제안은 분명 정략이다. 기자의 상식으론 그렇다. ‘노무현의 개헌’은 관철되지 못할 것임을 웬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날 갑자기 개헌을 제안하고, 여론에 개의치 않고 밀어붙이겠다니 무언가 헤아리기 어려운 정략이 숨어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한나라당에게 개헌은 일단 열리면 모든 불행과 재앙이 쏟아져 나오는 ‘판도라 상자’다. 말이 원 포인트 개헌이지 논의에 응하는 순간, 시민단체와 학계 등 사회 각 부문이 다른 조항도 바꾸자며 앞 다투어 끼어 들어 유리한 대선 판을 엉망으로 만들 것으로 본다. 개헌 주체가 꼭 정치권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영 억지는 아니다.
그럼 열린우리당이 개헌을 도울까. 반대는 안 하지만, 적극 나설 리 없다. 신당창당에 바쁠 뿐 아니라, 굳이 냉랭한 여론을 거슬러 신당을 망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무서운 것도 아니다. 의원들은 지난 총선에서 당에 공천권이 이양돼 노 대통령에게 공천을 받지 않았고, 다음에도 그럴 일이 없다. 게다가 노 대통령은 오래 전에 검찰이나 국정원 같은 ‘겁나는 기관’을 쥐락펴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을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통치 효율성 면에선 제 발등을 찍은 것이다.
여론은 이미 노 대통령에게 지쳤다. 10%대 지지율도 모자라 “노무현이 벌이는 일은 좌우지간 다 싫다”는 ‘노무현 디스카운트’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개헌은 나쁘지 않지만 다음 정권에서 하라’는 여론조사의 메시지가 단면이다. 개헌을 위한 정치공학적 여건은 가위 최악이다. 도무지 기댈 언덕이라곤 없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기가 죽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임기 말 대통령이 좀처럼 하기 어려운, 국민 앞에 직접 나서는 방법을 택했다. 야당은 물론 여당과도 사전 상의는 없었다. 이 방식은 국회가 좋아하지 않는 현안에 대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정치학 책에 나온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대통령의 인기가 높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은 조소(嘲笑)거리가 되고, 청와대와 국회의 거리만 더 멀어진다. 노 대통령 만큼 TV에 자주 출연한 대통령도 없지만, 당시 시청률과 지금의 지지도가 ‘효과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도 노 대통령은 또 했다.
노 대통령의 공세적 태도는 임기 말 대통령의 그것이 아니다. 함성득 고려대 교수는 <대통령학> 에서 “대체로 미국의 경우 임기 말 대통령은 소극적 국정운영 방식을 택하고 있다”며 “특정 정책을 적극 추진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추진력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랬다. 두 사람의 관록과 퇴임 1년 전 지지도가 노 대통령 보다 못하지 않았다. 대통령학>
노 대통령의 최근 언행은 어느 것 하나 정치판 상식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의도를 알 수 없다. 막연하게나마 다른 노림 수, 정략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정략은 없다”고 강변한다. 보이는 게 다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정략마저 없다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노 대통령은 정치인인가, 아닌가. 혹시 스스로를 백범 김구 선생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성식 정치부장 직대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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