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총리의 16일 대선 불출마 선언은 전격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연말부터 거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측근 참모들은 “구체적 내용은 16일 아침 ‘기자회견을 준비하라’는 고 전 총리의 지시를 받고 알았다”면서도 “연말연초에 계속 고민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고 전 총리가 불출마를 결심한 데는 우선 최근의 지지율 하락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고 전 총리도 이날 “여론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때 30%안팎의 지지율로 선두를 달렸으나 최근에는 10% 초반대까지 떨어진 것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수용한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하락세인 지지율을 반등시킬 비책을 찾기가 어렵다는 상황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측근은 “참모들이 ‘지지율은 오를 수 있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으나 고 전 총리는 ‘실질적 대책은 없다’며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지난 연말 벌어졌던 노무현 대통령과의 충돌도 중요한 이유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고 전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고 전 총리는 상당히 침통하고 불쾌해 했다. 평생 공직 인생을 살아온 그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노 대통령은 개헌 제안 등으로 중요한 기로 때마다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신당은 지역당”이라고 비난하며 신당에 제동을 걸었다. 이런 것들이 고 전 총리에게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자칫하다간 대통령과의 충돌 와중에서 평생 쌓아온 자긍심까지 잃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다 최근 여권의 주요 인사들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한 것도 맞물렸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지난달 19일 “고 전 총리와 함께 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고, 정동영 전 의장도 고 전 총리를 견제하는 분위기였다.
고 전 총리는 여권 인사들의 이 같은 기류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로서는 “난국에 빠진 여권에 도움이 되기 위해 정치활동을 하는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 나아가 “이런 수모까지 당할 이유가 없다”는 회의적 심경이 권력 의지를 누르는 단계까지 발전한 셈이다.
통합신당이 제대로 진척을 보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고 전 총리가 “기존 정당의 벽이 높아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꼈다”고 밝힌 것은 이를 의미한다. 특히 기존 정치권에 대한 고 전 총리의 회의가 컸다는 후문이다. 핵심 측근은 “원탁회의 등에 같이 하겠다던 정치인들이 상황이 조금 변하면 다른 말을 하는 등 돌변했다”며 “지지율이 높을 땐 달려들더니 지지율이 떨어지자 못 본 척하는 의원들에 대해 고 전 총리는 환멸을 느꼈다”고 전했다.
고 전 총리의 건강 문제와 가족들의 반대도 한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심각한 중병은 아니지만 고 전 총리는 지난해 8월 폐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이후 꾸준하게 약을 복용해왔다는 후문이다.
일각의 관측이긴 하지만 여권 핵심부에서 모종의 압력과 권유가 있지 않았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고 전 총리측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또 여권 일부에서는 “새로운 대선구도가 짜여진 뒤 여권에서 추대 기류가 강해지면 재등장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으나 고 전 총리측은 이런 가능성도 일축하고 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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