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필자는 지난 연말 이 난에 '대통령 임기개헌 지금 해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당시만 해도 일부에서 조심스레 운만 떼보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연초 대통령의 특별담화 이후 온 나라가 개헌 담론에 휩싸였다. 한국일보도 '개헌은 필요하지만 대통령의 일이 아니다' '민의와 거리 먼 대통령발 개헌논의' '개헌은 오기로 이루어질 수 없다' 등 연일 개헌론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장명수 칼럼> 은 '개헌, 진지하게 논의하자'는 글을 통해 발의자와 시기를 문제 삼아 개헌 논의를 외면하는 건 잘못이라는 주장을 폈고, 다시 '감동 없이 허망한 개헌 드라마'란 제목의 <강병태 칼럼> 은 대통령의 개헌론 제기에 깔린 부도덕성을 질타했다. 강병태> 장명수>
아무래도 독자들은 헷갈리고 곤혹스러울 것이다. 위는 한국일보 내부 필진의 글(사설을 포함해)이거니와, 외부 칼럼들 역시 취지가 갈리는 글들이 여러 차례 실렸다. 심지어 주장이 다른 사설ㆍ칼럼이 함께 게재된 날도 있었다.
이러니 "도대체 당신네 입장은 뭐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해서 여기에 개헌 얘기를 또 얹느니 이참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언론의 역할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일 듯 싶다.
● 단 하나의 관점이란 없다
한국일보의 대표 입장은 말할 것도 없이 사설이다. 사설은 신문의 제호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지는 만큼 논설위원들의 난상토론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칼럼은 토론이나 조정과정 없이 자유롭게 개인의 견해를 펼쳐 보이는 글이다. 외부필진의 칼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사설과 다른 취지의 칼럼이 종종 실리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설과 견해가 다른 칼럼은 대법원ㆍ헌법재판소의 판결ㆍ결정과정에서의 소수의견에 비견할 만하다. 배척된 소수의견이라 해도 장차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수의견이 될 수 있으므로 결코 그 가치를 가벼이 보지 않는 게 법 정신이다. 소수의견과 해당판사의 이름을 판결문이나 결정문에 병기하고 공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 측이 언론을 비판하는 근거에 "과거 이렇게 주장하던 신문이 지금 와선 딴 소리 한다"는 것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이런 대목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사실 언론의 기회주의적 속성 탓이 더 크다는 점을 부인키는 어렵다).
문제는 정작 현재 대부분의 우리 언론이 갖고 있는 맹목적 획일성이다. 어느 쪽이든 방향이 정해지면 모든 기사와 사설, 칼럼이 오로지 일로매진하는 행태가 그것이다.
마치 눈 옆을 가린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하지만 세상사가 다 그렇듯 어느 한 측면으로만 완전하게 규정될 수 있는 사안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개헌 뿐 아니라 대북문제, 한미관계, 작전권, FTA든 다 마찬가지다.
다른 시각에 대한 배려를 접으면 나팔소리를 더욱 키워 밴드왜건(band-wagon) 주변에 더 많은 군중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경박한 경쟁만 남는다. 이렇게 되면 독자들도 더 이상 다양한 사고나 이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처음부터 취향에 맞는 논조만 선택해 그 일치감을 즐기는 매체접근 방식에 길들여지게 된다.
● 최종 선택은 결국 국민의 몫
이래 가지고서야 발전적인 사회적 논의는 기대하기 어렵다. 현안마다 인식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급기야 일말의 접점조차 없이 극한대립으로 치닫곤 하는 현상은 우리 언론 일반의 이런 모습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언제나 독자이자 국민의 몫이다. 특정 관점의 편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다른 시각들도 존중함으로써 보다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것, 그게 변치 않는 언론의 본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게 또한 우리의 입장이다.
이 글? 물론 필자 개인의 소견을 담은 '칼럼'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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