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미래를 그리는 영화들에는 차가운 파란빛이 가득하다. 내겐 영화 <가타카> (Gattacaㆍ1997ㆍ감독 앤드류 니콜)도 그런 빛으로 기억된다.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했다는 이 영화가 그리는 세상에서는 유전자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열성인자를 제거하지 않고 부모의 섹스를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신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사회의 중요한 자리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열성 인자를 모두 제거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독차지한다. 신의 아이들은 엘리트 계층으로 올라갈 수 없고 사회의 음지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가타카>
주인공 빈센트는 키도 작고 눈도 나쁜 신의 아이. 그가 태어나는 순간에 행해진 유전자 검사 결과는 그가 심장병을 앓을 확률이 높고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31살에 사망한다는 예언을 내어놓는다. 실패작 빈센트에 실망한 부모의 역작은 둘째 안톤. 열성인자를 모두 제거하고 인공 수정으로 얻은 아이이다. 운명은 유전자로 결정된다.
유전자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유전자에 쓰여 있다고 믿는 사회가 시도 때도 없이 유전자 검사를 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빈센트의 꿈은 우주에 가는 것이지만 그런 임무가 열성 유전자를 가진 신의 아이들에게 주어질리 만무하다. 우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반신불수가 되어 그것이 쓸모없게 된 제롬의 타액, 혈액, 머리카락, 체액, 비듬으로 위장해 유전자 검사를 통과한 빈센트가 온갖 역경을 헤치고 토성으로 가는 우주선을 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아이가 좋은 형질을 타고 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튼튼한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는가. 조금 더 나아가 행복한 개인들이 모두 살기 좋은 사회. 그런 사회의 모습은 꿈에 그리던 ‘천국’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가타카’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어둡고 차가울까? 화면에 비치는 가타카 사람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일하는 모습도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다.
처음 생각해 볼 수 있는 답은 걸림돌이 되는, 열등한 ‘신의 아이들’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애버리면 될 일. 열등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미래가 아닌 과거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나치가 시행한 정책이다. 나치가 유대인을 차별하고 대량 학살을 했다는 사실이 더 지탄을 받지만 유대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나름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단종 시술을 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육체적 결함이나 정신적 지체를 이유로 수많은 남자들이 정관을 끊어야 했고 여자들은 자궁을 적출 당하거나 엑스레이를 쬐어 난소를 파괴해야 했다. 그 과정의 끔찍함은 차치하더라도 우수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임의적이어서 결과도 별 볼일 없었다. 뭐, 백번 양보해서 과학이, 좁게는 유전공학이 인간의 한계를 모두 극복했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충분한 물질과 오락을 즐길 수 있다고 해 보자.
이렇게 되더라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부귀와 영화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행복한 사람들의 유전자 표준형이 정해지고 그에 맞추어 성격 좋은 유전자, 힘쎈 유전자, 죽지 않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만 활보하는 세상, 설혹, 나쁜 병균들이 침입해도 유전공학적으로 생산된 약품으로 모두 치료가 되고, 유전공학을 이용해 만들어 넘쳐나는 식량 더미 위에서 함포고복(含哺鼓腹) 하는 시대의 사람들 각각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천국’이 땅에 임한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 ‘천국’은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는 재앙의 근원지일 수도 있다.
생물들을 둘러싼 환경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지금의 환경을 A, 변화된 환경을 B라고 해 보자. A라는 상황에서 가장 좋은 유전자의 표준이 B라는 상황에서는 최악의 조합일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유전자 조합은 전통적인 감기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력을 보이지만 홍콩조류독감 바이러스처럼 새로 등장한 병원균 앞에서는 무력하다.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조금 더 치명적인 것이고 인류에게 그것에 저항할만한 유전적 조합을 가진 개체가 없다면 인류는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당장의 조건에 조금 불리하다고해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 다양성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천국’을 건설하다니! 그 ‘천국’은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찰라의 것이기 쉽고 조금만 흔들어도 무너진다. 사는 것이 빡빡하고 고달프면 ‘천국’에 대한 생각이 한층 더 간절한 법. 그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천국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여러 나라들이 섰다가 무너지는 긴 시간의 흐름 淡?흘러간 정치, 철학, 제도, 기술 같은 것들의 바닥엔 지상에 낙원을 세우려는 꿈들이 있었다. 서구의 근대과학이 등장한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보여준 위력적인 힘에 기대를 걸었다.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보여주는 듯이 보이는 근대과학을 업으면 ‘천국’의 문을 지상에서 두드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이전의 시도들 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기술과 결합한 근대과학의 놀라운 생산력은 사람들을 압도했고 물질적 풍요 속에서 몇 가지 장애들만 제거하면 ‘천국’을 손에 쥐게 되리라 믿었다. 아니,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평균적인 풍요 속에서도 항상 존재하는 분배의 불균형, 기술 발전의 부작용으로 불거진 환경의 파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남아있다. ‘천국’의 논리적 실현 가능성을 떠나, 이 시점에서 조금씩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어떤 일들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희귀한 질병으로 죽는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데 유전공학 기술이 적용되는 우선순위는 후자에 놓여 있다면, 더구나 그러한 경향이 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방향 때문이라면 이것은 옳은 것일까? 우리들의 ‘지옥’위에 그들만의 ‘천국’을 짓는 일은 타당한 것일까? 나는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시급한 것이라고 믿는다.
■ 못생긴 철학자 + 미녀 = 똑똑하고 잘생긴 아이?
<가타카> 는 전도서 7장 13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하느님이 행하신 일을 보라, 하느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자연이 굽혀 놓은 것을 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체외수정을 통해 아이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의식한 인용이다. 두려운 결과에 대한 경고이다. 가타카>
몸 밖에서 수정되어 처음 태어난 시험관 아기는 영국의 루이스 브라운. 며칠 전, 자연 임신을 통해 첫 아들을 얻은 그는 벌써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우체국 직원이다. 우리나라의 첫 시험관 아기도 성년이 되어 군복무 중이다.
현재 시험관 아기의 숫자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수십 만 명에 달한다. 처음에 하늘의 뜻을 거스른다고 반대하던 사람들도 시들해졌고 출산율이 떨어져 고민인 한국 정부는 시험관 아기 시술을 장려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젠 시험관 아기 기술을 이용해서 맞춤 아기를 판매하는 시대다. 지난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독신 여성과 불임 부부가 난자와 정자 제공자의 신상정보를 검토한 뒤 자신들의 취향에 맞추어 주문할 수 있는 '기성배아' 판매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여대생의 난자와 변호사의 정자로 만든 22개의 배아 중에서 2개를 주문한 여성에게 시술했다고 한다. 판매자는 생식세포 제공자의 자격을 대졸, 박사, 변호사 등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신체 검사와 성장환경, 가족사, 질환, 범죄경력 등의 철저한 조사를 거친다고 광고해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머리와 내 얼굴과 몸매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미녀의 구혼에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닮은 아이가 나올까봐 심히 두렵다"고 퇴짜를 놓았다는 못생긴 철학자의 농담만 자꾸 떠오른다. 이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수준이다. <가타카> 가 그린 시대의 과학기술 수준은 아직 그림의 떡이고, 하늘의 뜻은 시험관 정도는 뚫고 관철된다. 가타카>
과학평론가ㆍ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주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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