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브라 딘 지음ㆍ송정은 옮김 / 랜덤하우스 발행ㆍ360쪽ㆍ1만원
텅 빈 액자들만 걸려 있는 거대한 미술관이 있다. 폭격을 피해 그림들은 모두 어딘가로 보내졌고, 전기가 끊긴 미술관은 어둡고 춥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회랑. 그 사이를 어느 젊고 아름다운 안내원이 30여명의 어린이 관람객들을 이끌고 걷고 있다. 그녀는 주요 그림이 있던 자리마다 멈춰서서 텅 빈 액자에 랜턴을 비추고, 마치 그곳에 그림이 있는 듯 설명을 시작한다.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여자.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회랑을 울리면 어린이들은 그 텅 빈 액자에서 루벤스와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본다. 1941년, 나치의 침공을 받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 는 예술과 기억의 힘으로 전쟁의 참혹을 견뎌낸 한 여인의 이야기다. 구원으로서의 예술, 인간 존재의 존엄함과 궁극적 아름다움…, 이런 거창한 단어들이 실로 느닷없이 세속의 일상인을 습격해 울렁증을 겪게 하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소설이다. 레닌그라드의>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82세의 마리나는 손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편 드미트리와 함께 시애틀 인근의 작은 섬으로 떠난다. 교란되고 혼융되는 기억들. 그러나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관람 가이드로 보냈던 20대의 전쟁 시절만은 오롯이 생생하다. 미술관 소장품들을 포장해 은닉처로 보내는 일을 했던 그녀는 2,00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그림 붙이는 풀을 끓여먹으며 미술관 지하 대피소에 숨어 살았다. 절대빈곤과 기아, 참척(慘慽)의 한과 아귀다툼이 들끓는 그곳에서 전쟁터로 떠난 첫사랑 드미트리를 기다리며 뱃속의 아기를 키우는 마리나. 그런 그녀에게 미술관의 늙은 여직원 아냐는 ‘기억의 왕국’을 세우자고 권유하고, 그림의 위치와 순서, 내용과 디테일을 모조리 외워 머리 속에 미술관을 복원하자는 이 제안은 마리나에게 생을 버티게 하는 긍휼이 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해야 해.” 아냐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거야. 그러면 그들은 처음부터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제멋대로 지껄일 거야.” 그래서 매일 아침, 이 두 여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전시실들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그들은 매일 전시실을 몇 개씩 더 추가했고, 머리 속에 이 그림 저 그림, 이 조각 저 조각들로 에르미타주를 다시 채워 넣었다.(125~6쪽)
소설의 각 장은 젊은 날의 마리나가 미술관을 안내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치매 환자가 된 현재의 그녀와 900일간의 대피소 생활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교차한다. 먼 북소리처럼 나치의 패망 소식이 들려올 즈음, 은밀히 재개된 마리나의 미술관 투어. 포로수용소에서의 부역행위로 고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드미트리를 따라 마리나는 미국으로 가 이민자의 고단한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언어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그림을 보게 된 이들의 탄성과 눈물은 그 낯선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된다.
미문(美文)에 힘입지 않고 이야기만으로 이 같은 아름다움과 우아함, 격조를 구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력적인 이미지와 입체적인 플롯, 이야기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우직하고 담담하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 소설은 렘브란트의 그림이 나치의 폭격이나 굶주림을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폭격과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떻게 끝내 존엄할 수 있는지를 사무치게 보여준다. 기억을 잃고 섬을 헤매던 마리나가 숨을 거두기 직전 행한 미술관 안내는 소설 속 건설인부뿐 아니라 독자의 가슴에도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이 작품이 첫 소설인 데브라 딘은 미국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로, 실화였던 에르미타주의 가상투어를 다룬 PBS 다큐멘터리를 보고 6년에 걸쳐 이 소설을 썼다. 취재비가 없어 러시아에 가보지 못했다는 미국인이 이토록 러시아적이고 실감나는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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