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지음ㆍ이희재 옮김 / 민음사 발행ㆍ692쪽ㆍ2만5,000원
격동의 세월을 산 한 노장의 삶이 있다. 20세기 최고 역사학자의 반열에 든 에릭 홉스봄(90)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 . 혁명가도, 육체 노동자도, 밑바닥 빈민도 아니었기에, 어디에 목숨을 걸었다거나 빵을 얻기 위해 수모를 인내했다는 식의 수식어로 과장할 수 있는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책만 파고든, 세상 물정 어두운 고립된 지식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대를 국외자로 관찰한 게 아니라 그것을 더 좋게 다듬을 수 있는 실천의 대상으로 여기고 현실에 뛰어들었다. 그런 점에서 <미완의 시대> 는 한 개인의 삶이지만 한 시대의 이야기이다. 미완의> 미완의>
홉스봄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당시 중립국 이집트에서 유대계 영국인 아버지와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빈과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그 시절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히틀러의 등장이었다. 유대인이자 영국인으로서 그는 나치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묵과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학생동맹에 가입했다. 이를 인연으로 홉스봄은 1990년대 초 동구가 몰락하고 영국 공산당이 해체될 때까지 공산당원으로 남아 있었다.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할 당시 “모르는 것 없는 신입생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는 주목 받는 학생이었다. 그가 택한 전공은 역사였지만 공산당원이었기에 모교 강단에는 서지 못했다.
그는 어려서, 젊어서 넉넉하거나 사회적으로 든든하지 못했지만, 역사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석학이 됐다. <역사론> <극단의 시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같은 저서는 한글로 번역돼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자의 명성을 쌓으면서도 상아탑에 안주하지 않았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핵무기 확산 반대 시위를 했고,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자처했다. 메마른 이론가도 아니어서 가명으로 재즈 비평을 하기도 했다. 자본의> 혁명의> 극단의> 역사론>
그는 전통의 허구성도 폭로했다. <만들어진 전통> 이란 책에서 영국 여왕이 의회 개원 때 마차를 타는 성대한 의식이, 겨우 19세기 후반에야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까발렸다. 스코틀랜드의 남자 치마 역시 잉글랜드 기업주가 스코틀랜드 인부를 더 많이 부리기 위해 일하기 편하라고 입힌, 전통과는 전혀 무관한 옷이라고 주장했다. 홉스봄은 전통이 국민 순치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국민국가 탄생에 대한 그의 반감과 무관치 않다. 그에게 유럽의 국민국가는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만들어진>
홉스봄은 유대인의 피를 받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스라엘과 같은 호전적 국가는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해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유대인은 세계에 흩어져 사는 게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그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홉스봄은 사람은 뿌리를 박고 사는 식물이 아니기 때문에 지구를 누비는 철새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홉스봄은 이집트에서 나 독일에서 자라고 영국 국적을 가진 코스모폴리탄이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인이요, 영국에서는 유럽 이민자이며, 어디서나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도 배척받았다.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였지만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별종 취급을 받았고 그의 책은 소련에서 판매 금지됐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역사와 시대는 미완의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에필로그에서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번역본에 ‘미완의 시대’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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