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지음ㆍ이현경 옮김 / 돌베개 발행ㆍ340쪽ㆍ1만2,000원
“내가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된 것은 1943년 12월13일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는데 영리하지도 못하고 경험도 없었다.”
‘여행’이라는 소제목 아래 놓인 이 심상한 글이 ‘아우슈비츠’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가 자신의 대표작 <이것이 인간인가> 를 여는 첫 문장이다. 이것이>
그리고 펼쳐지는 절망의 풍경! 생지옥, 짐승, 도살, 피눈물 등 인간의 이름을 수식하는 모든 음울한 비유들의 무덤 ‘아우슈비츠’의 풍경이 열린다. 이 풍경을 레비는, 언어 자체의 피안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189쪽)
레비는 영혼마저 표백하는 파시즘의 실험적 광기와, 피실험자들의 동물적 생존경쟁, “자신의 도덕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 채 생존”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수용소 공간의 낯선 윤리를, 저 첫 문장의 절제 위에서 펼쳐나간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풍경을, 다는 아니어도 대충은, 보아왔다. 레비가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모노비츠)에서 보낸 13개월(45년 1월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것도 지옥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을 보여주고자 한다.
집과 옷과 밥과 사랑했던 사람과 자신만의 습관과 이름을 빼앗겨버린, 오직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존재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가”야 했던 절망의 시간을 견디게 한 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씻는 일조차 노동일지라도, 돌아서는 순간 가스실로 끌려가더라도, 흙탕물로라도 샤워를 하려는 의지.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한 가지 능력(…)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58쪽)
그리고, ‘희미한 선(善)의 가능성’.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희망.(187쪽)
그리하여, 고통의 기억을 의무로 여기며 끝내 살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야만 바깥의 세상에서 증언함으로써, 다시는 인간이 악몽 같은 실재의 시간과 대면하지 않도록 하자는, 숭고한 오기.
그렇게 살아남은 레비는 이 책 외에도, 수용소에서 나온 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휴전> , 유대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과 탐구의 이야기로 이번에 함께 번역된 <주기율표> (383쪽ㆍ1만4,000원) 등을 썼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양보하는 자리, 또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품게 되는 동물적 본능과도 같은 적대감을 용인하는 자리가 ‘아우슈비츠’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경고를 남긴 채, 꼭 20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기율표> 휴전>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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