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포항지역건설노조원 1,500여명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경북 포항시 포스코 건물을 불법 점거했다. 건설노조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관계자는 “미리 계획된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전혀 몰랐다”며 몹시 당황스러워 했다. 그는 “건물 점거 등의 돌출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시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며 “통제불능 상태라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쓰게 웃었다.
2개월 뒤 9월 노사정은 노동계 최대 쟁점이던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에 합의했다. 2007년 1월부터 시행 예정이던 복수노조제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3년 유예하는 것이 골자였다. 민주노총이 반대한 안이어서 합의에는 한국노총만 참여했다.
합의안이 발표될 때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차대한 시점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를 위해 미국에 갔다. 중심을 잡아 줘야 할 리더가 없는 민주노총은 우왕좌왕했다. 급기야 고삐 풀린 일부 조합원들이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을 야합의 당사자로 지목하며 구타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를 도화선으로 양 노총은 지금까지 갈등하고 있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노조 간부 비리
요즘 노동계는 선장 없는 난파선과 같다. 무리한 파업과 타협 없는 강경노선에 대해 비판 여론이 비등한데도 강성노조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은 믿고 따를 만한 리더가 없기 때문이다.
리더십 부재는 노동계가 자초했다. 몇 년 새 잇따라 곪아 터져 나오고 있는 노조 간부들의 비리에 조합원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2005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핵심 간부들이 수뢰 혐의로 구속돼 노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또한 기아자동차 노조 등의 노조 간부가 돈을 받고 취업을 시켜주는 ‘취업장사’를 해 온 사실도 드러나 사회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다.
도덕적 해이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 조직의 와해 위기를 느낀 양 노총은 서둘러 비리를 근절할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지난 연말 조합원 4만3,000명의 국내 최대 노조인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가 노조 창립기념일 기념품 납품 비리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도덕적 치명타를 입은 박유기 위원장 등 현대차 노조 집행부는 임기를 1년 앞두고 불명예 조기사퇴 의사를 밝혀야 했다.
노조에서 젊은 조합원들의 활동이 시들해진 것도 리더십 부재의 원인이다. 조직은 새 피가 활발하게 돌아야 역동성 있게 굴러갈 수 있다. 열의를 가지고 노조 활동을 하는 젊은 조합원들이 없다 보니 노조는 변하지 않고 구태만 답습한다.
젊은 조합원들이 노조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입사 때부터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주택관리공단 노조 진성문 위원장은 “요즘은 신입사원이 노조 일을 한다면 그 가족이 앞장 서 말릴 정도로 노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안 좋다”며 “우리 노조는 매년 노조 창립일 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등 자선행사를 하는데 젊은 조합원에게 노조 활동에 대한 자긍심과 보람을 심어 주려는 고육지책의 하나”라고 털어 놓았다.
●정파 싸움에 멍드는 노조
노조가 정치판처럼 수많은 정파에 휩싸여 세력 다툼의 장이 된 것도 문제다. 민주노총에는 현재 크게 국민파(온건파) 좌파 범좌파 3개 계파가 있다. 이들은 다시 민주노동자전국회의, 혁신연대,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노동자의 힘, 전국활동가조직, 새흐름 등 핵분열하듯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쪼개져 있다.
민주노총의 현 지도부는 현재 대화를 중시하는 국민파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지난해 여론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한 달 반에 한 번 꼴로 정치성 총파업을 했다. 국민파 지도부가 투쟁을 중시하는 정파들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도부 사퇴로 조기 선거를 앞두고 있는 현대차 노조도 마찬가지다. 현대차에는 현재 민주노동자회, 실천하는 노동자협의회 등 10개가 넘는 계파가 있다.
계파에 속한 노조원들은 지도부가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따로 모임을 만들어 나가 버린다. 겉으론 단결을 외치지만 속으론 끊임없이 상대 정파를 흔드는 등 헤게모니 싸움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다. 노동 전문가들은 “이렇듯 다양한 정파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는 누가 위원장이 되더라도 갈등을 조정하고 소신대로 정책을 펴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권력집단으로 변질돼 가는 노조에 환멸을 느껴 노동계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며 “노동운동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노조가 건전한 내부비판을 통해 서로를 감싸주는 ‘사람 냄새 나는 조직'으로 듭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합리적 노조' 표방 이용득 한노총 위원장
“우리 노동계에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같은 분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노동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노총의 이용득(사진) 위원장이다. 이 위원장은 지난해 합리적 노동운동을 표방하며 노사협력을 통한 상생을 강조, 노동계는 물론 경영계에서도 많은 지지를 얻었다.
정부와 손 잡고 미국 일본 등에서 열린 투자설명회에 참가해 “노조 투쟁 걱정 말고 한국에 투자하라”며 외국 자본가들을 안심시켰다. 노동계의 과격 시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경찰 없는 평화집회’를 시도해 주목 받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노동계에 리더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그 원인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몇몇 강성 노조들의 ‘그들만의 노동운동’을 지목했다. 그는 “능력 있는 노조 위원장이 뽑혀도 여러 정파들의 눈치를 살피다 보면 지도자 다운 목소리도 못 내고 방향 제시도 못하는 것이 우리 노동계의 현실”이라며 “간부 비리에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한 이수호 전 위원장이 대표적인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마다 추락하는 노조조직률을 다시 끌어올리고 노동계를 이끌 리더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이 대중의 곁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노조는 이제 무책임한 투쟁을 지양하고 사회적 주체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26일 민노총 위원장 선거
26일 열리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는 올 노사관계를 결정할 최대 변수 중 하나다. 어떤 성향의 후보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민주노총의 투쟁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온건파 계열의 후보가 선출되면 노사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강경파 쪽에서 위원장이 나오면 민주노총의 투쟁수위가 높아져 노사관계가 경색 될 가능성이 높다.
위원장 선거는 3파전으로 치러진다. 이석행(48)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양경규(48) 공공연맹 위원장, 조희주(54) 전 전국교직원노조 부위원장이 새 위원장 후보로 출마했다. 이 후보는 대화와 투쟁 병행을 주장하는 국민파(온건파) 계열이고, 양 후보는 투쟁을 중시하는 중앙파, 조 후보는 투쟁 성향이 매우 강한 극좌파 계열이다.
이번 선거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박빙의 승부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3명의 후보 중 앞선 쪽은 민주노총 최대 계파인 국민파의 이 후보다. 하지만 이 후보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를 못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온건파와 범좌파 후보가 펼치는 2차 결선투표에서 비온건파가 승리할 수도 있다.
노동계의 한 전문가는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는 국민파 계열의 현 지도부가 비정규직 보호법과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 입법화 과정에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조합원들이 노사 대결을 지향하는 강경파 쪽을 선택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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