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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5> 시대의 비천함, 인간의 고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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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5> 시대의 비천함, 인간의 고귀함

입력
2007.01.0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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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2002, 야간비행, 이하 <옥중서한> )을 읽는 것은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을씨년스러운 음지 한 군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을씨년스러움을 인간존재의 눈부신 고귀함으로 승화시키는 어떤 정신의 다사로운 양지를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그늘과 볕이 서로 맞서고 뒤섞이고 포개지며 빚어내는 긴장 속에서, <옥중서한> 의 사적인 언어는 한 시대의 무게를 통째로 감당하는 공적 언어로 바뀐다.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자란 서준식(59)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와 서울대 법과대학엘 다녔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0년 그는 형 서승과 함께 북한엘 다녀왔고, 이듬해 이 일이 드러나며 간첩 혐의로 기소돼 징역 7년, 자격정지 15년형을 받았다. 징역형을 꼬박 치러낸 1978년에도 서준식은 자유를 얻지 못했다. 이른바 ‘사상전향’이라는 것을 거부한 탓에, 그는 사회안전법상의 피보안감호자로 그 뒤 10년을 더 갇혀 있어야 했다. <옥중서한> 에는 그 17년 세월동안 그가 가족과 친척에게 보낸 편지들이 담겼다.

서준식 자신이 서문에서 들췄듯, 전향 문제는 <옥중서한> 의 ‘라이트모티프’ 가운데 하나다. 사람에 따라선 대범히 넘길 수도 있을 이 문제가 옥중의 서준식에게는 제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할 생명선이었다. 전향서 한 장 쓰면 풀려나올 수 있는데도 서준식이 그 길을 마다한 것은 그가 ‘뉘우칠 줄 모르는 공산주의자’여서도 아니었고, 내용보다 형식을 더 무겁게 여기는 ‘형식주의자’여서도 아니었다. 그가 형기를 마친 뒤에도 더 갇혀있기로 결정한 것은, 세상사 가운덴 내용과 형식을 또렷이 가를 수 없는 일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형식을 간직하는 일이 바로 내용을 간직하는 일일 수도 있”(82년 3월11일, 누이 영실에게)는 것이다. 서준식이 보기엔, 바로 ‘양심의 자유’ 문제가 그랬다. 그의 ‘지상목표’는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없는 것’”(83년 3월25일, 아버님께)이었다.

1978년 이후 서준식에게는 전향서를 쓸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 해에 징역형 7년 만기를 채운 그는 그 뒤 ‘수형자’로서가 아니라 사회안전법 상의 ‘피보안감호자’로 갇혀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잠깐 평양 구경을 한 데에 대한 ‘죗값’을 다 치르고도, ‘재범의 위험’ 때문에 계속 갇혀 있어야 했다.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나는 분명히 이런 식으로 주장한 일이 없다) 생각, 고백, 주장하는 사람은 형기를 다 살아도 석방하지 말아야 하는가? 혹은 행위를 저지르지 않아도 잡아 가두어 놓고 있어야 하는가?”(88년 2월4일, 고종사촌동생 순전에게). 그러니까 형을 치르고 있는 ‘수형자들’에게 전향 문제는 온전히 개인적 결단의 문제였지만, ‘피보안감호자’ 서준식에게 그것은, 거기에 더해, 위헌적인 사회안전법에 맞선 법률투쟁의 문제이기도 했다.

서준식이 보안감호처분 갱신 결정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이돈명 변호사와 겪는 갈등도 이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이 변호사는 서준식에게 전향서 따위를 쓰라고 권고할 만큼 몰상식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는 법정에서 서준식의 ‘사상적 결백’을 드러냄으로써(다시 말해 서준식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보안감호처분의 부당성을 주장하려 했다. 그러나 서준식은 인간의 내면에 국가가 간섭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이 변호사는 ‘사실’을 중심에 놓으려 했고, 서준식은 ‘법률’을 중심에 놓으려 했다.

파쇼체제 아래서 법률투쟁을 하는 것이 헛일이라고 판단한 이 변호사는 서준식의 석방 가능성을 되도록 높이기 위해 ‘사실’ 쪽으로 싸움의 방향을 정한 것이지만, 사회안전법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속죄양”(88년 1월15일, 고종사촌누이 순미에게)이 되기로 마음먹은 서준식에게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싸움 방식이었다. “소송을 제기하여 (사회안전법의--인용자) 위헌을 주장하는 내가 법정에서 자신의 ‘사상적 결백’을 증명해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본말전도된 일이며 자가당착인가?”(83년 5월2일 영실에게).

전향 문제와 더불어, <옥중서한> 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사랑이다. 서준식에게 사랑은 약한 것에 대한 연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사랑’이란 언제나 ‘불쌍’과 거의 같은 뜻이었던 것 같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면 진정 마음을 주고 사랑하지 못했다”(81년 12월25일, 이종누이 선암에게). 감호소 생활 끝머리 무렵을 제외하곤 기독교(만이 아니라 온갖 형태의 ‘세속화한’ 종교)를 줄곧 백안시했던 서준식이 예수의 삶을 살갑게 추적하며 그를 본받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예수에게서 약자의 벗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민과 나란한 이 사랑은, 서준식에게, 이념이 아니라 윤리였다. 사촌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거듭 ‘착한 삶’을 강조하는 것도 서준식이 이념의 인간이라기보다 윤리의 인간이라는 뜻이겠다.

서준식은 예수에 더해 백범에 대한 존경을 <옥중서한> 여기저기서 드러내고 있으나, 그가 닮은 것은 차라리 ( <옥중서한> 에서 몇 차례 인용되는) 시인 김수영이다. 결벽증(그 자신은 부정하지만), 신경질, 자의식 같은 뾰족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형 서승에 대해 서준식이 드러내는 마음의 뾰족함은 김수영이 박인환에게 드러낸 태도를 설핏 연상시킨다.) 그러나 서준식은 김수영보다 훨씬 굳셌다. 잠깐의 포로수용소 생활로 얼마동안 정신을 놓아버린 김수영이, 폭압적인 전향공작이 되풀이되는 파쇼체제의 감옥에서 17년을 버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좋은 세월을 살았더라면, 서준식은 또 자신이 <옥중서한> 에서 몇 차례 호의적으로 거론한 로맹 롤랑(의 작품 주인공들)과 닮은 (투쟁적이면서도 미적으로 고양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옥중서한> 이 (일본의) 가족과 (한국의) 친척에게 보낸 편지들이라는 점으로 돌아가 보자. 수신자인 가족 친척들도 당연히 서준식에게 편지를 보냈을 테다. 사실 <옥중서한> 에는 답장 형식의 편지가 여럿 있다. 그러니까 <옥중서한> 은 거기 드러난 텍스트말고도 얼추 그 분량의(아마 더 많은 분량의) 텍스트를, 17년 세월 동안 서준식을 수신인으로 삼은 편지텍스트를 배면에 거느리고 있는 셈이다.

교도소나 감호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바깥에서도 세월이 흘러, 서준식의 부모와 그 항렬 친척 어른들이 차례로 작고하고, (사촌)누이들은 하나둘 출가한다. 출가한 누이들에게선 편지가 뜸해진다. 서준식은 그것이 서운하다. 그러나 코흘리개 조카들이 어느새 자라나 서준식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누이들과 조카들은 진로와 연애와 공부와 살림살이 등 신변의 이런저런 걱정거리들을 서준식에게 털어놓고, 옥중의 오빠(형), 옥중의 삼촌은 지혜를 짜내 그들에게 조언한다. 다시 말해 <옥중서한> 은 한국 정치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통과하는 어떤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어를 읽을 수 없는 일본의 조카에게 서준식은 일본어로 편지를 쓴다. 그러나 그의 모어, 일본어는 예전 같지 않다. “13년간이나 창고 한 구석에 팽개쳐 놓았던 일본말을 끌어내어서 먼지를 털어 봤더니 여기저기가 녹슬어 버려 도저히 나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 같지가 않다. 틀린 데가 있어도 웃지 말아라. 삼촌은 한국사람이니까 일본말은 서툴러도 부끄럽지 않다”(84년 6월8일, 조카 순이에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조국을 찾은 19세 청년에게 낯설고 불편하기만 했던 한국어는 30대 장년의 ‘사상범’에게 유일하게 편안한 언어가 되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자리를 바꾸는 이 과정은 ‘자이니치(在日)’ 서준식이 ‘본국인’ 서준식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감호소에서 풀려난 1988년을 기준으로, 서준식의 ‘본국인’ 생활 21년 가운데 그가 자유로웠던 기간은 4년뿐이었다.

옥중의 서준식에게서 편지를 가장 많이 받은 이는 일본의 친누이 영실이다. 그러나 서준식의 편지는 영실에게 가장 가혹하다. 더러, 옥중에서 맺힌 짜증을 이 누이에게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것은 옥중의 서준식이 정신적으로 가장 기댔던 사람이 영실이라는 뜻이기도 할 테다. 1981년 12월16일자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준식은 “저는 이중인격자입니다. 서울에 있는 동생들(사촌동생들--인용자)에게는 ‘지킬박사’가 편지를 쓰고, 영실에게는 ‘하이드씨’가 편지를 씁니다”라고 쓴다.

그리곤, 아버지가 작고한 뒤, 마침내 이 말을 당사자에게도 털어놓는다. “영실아, 나는 이중인격자인가보다. 하얀 엽서(국내용 봉합엽서)를 펴놓고 펜을 잡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숨기고, 해서는 안 될 이야기와 해도 될 이야기를 가려가면서 도덕 교사가 되고 성인군자가 된다. 하지만 푸른 엽서(일본의 영실에게 보내는 해외용 봉함엽서--인용자) 앞에서 나는 성인군자연하지 못한다. (중략) 거기서 나는 (하얀 엽서를 받아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못할 정도로) 절망하고 포악해지고 자학하고 서러워하고 염세에 빠지기도 한다”(84년 11월1일, 영실에게).

이 편지에서도 엿보이듯, <옥중서한> 은 세상에서 고립된 자가 수행하는 ‘마음 다스림’의 기록이기도 하다. 고립의 현실과 연대의 열망을 팽팽한 긴장 속에서 버무리며 서준식은 17년을 버텼고, 한국어로 짠 가장 순정한 텍스트들이 그 세월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를 가두어놓은 파시스트들은, 의도하지 않은 채, 한국어 서간문학의 웅장한 마천루 하나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셈이다.

서준식은 <옥중서한> 서문에서 이 편지텍스트들의 ‘라이트모티프’를 민족, 자생, 전향, 종교로 간추렸다. 나는, 독자로서, 그와 달리, <옥중서한> 의 ‘라이트모티프’를 양심과 기품으로 요약하고 싶다. 그 양심과 기품이 옥중의 그를, 그가 닮고 싶어했던 예수처럼, ‘스스로 권세있는 자’로 만들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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