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 쑤퉁 지음·김은신 옮김 / 아고라 발행ㆍ384쪽ㆍ9,500원
무엇이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지 이 책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악마적 속성을 확대하며 어디까지 비열해질 수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쌀(米)> 은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쑤퉁(蘇童·44)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그는 궁리가 출연하고 장이머우 감독이 만든 영화 <홍등> 의 원작 <처첩성군(妻妾成君)> 의 원작자로도 유명하다. 이 책 역시 <대홍기 쌀집> 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과도한 성적 묘사 때문에 중국에서 7년 동안 상영금지 되기도 했다. 대홍기> 처첩성군(妻妾成君)> 홍등> 쌀(米)>
악하기도 하면서 선하기도 하고,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비겁하지만 때론 정의로운 인간의 다면적 속성은 이 책에서만은 예외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중국의 중소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홍수가 난 고향을 등진 우룽이라는 청년이 세상에 치이면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쌀 향기에 매혹돼 쌀집 앞에서 구걸을 하던 우룽이 가게 일꾼으로 들어가 속물적인 큰딸과 몰인정한 둘째딸을 차례로 차지하며 쌀집을 몰락시킨다. 지역의 거물이자 부두 조직의 우두머리가 돼 음모와 살인을 일삼던 우룽은 발가락부터 시작해 몸 여기저기가 잘리고 뒤틀리고 썩어 만신창이가 된 채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숨을 거둔다.
쌀로 몸을 덮은 채 쌀 향기 속에서 고향을 꿈꾸는 것이 유일한 행복인 우룽에게 도시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한…거대한 올가미가 되어 누구든 걸리기만을 바라고”있는 곳이자 “쌀 한 줌을 얻기 위해, 동전 한 닢을 벌기 위해, 욕정을 한 번 채우기 위해”(308쪽) 사람들이 몰려드는 지옥이다. 돈만 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깡패, 모피 코트와 순결을 바꾸며 욕망을 좇는 소녀, 어린 여동생을 쌀에 파묻어 죽이고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소년, 아버지의 주검에서 금으로 된 틀니를 빼내고 좋아하는 아들…부부는 물론 부자간에도 물욕과 배신이 넘친다.
작가 쑤퉁은 염치없고 잔인한 인간 군상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복수와 증오로 물든 삶이 어떻게 악몽이 되는지 얘기하고 있다. 얼마든지 매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인물의 감정을 생략하거나 복수심만을 서술해 독자의 동정이나 공감의 군더더기를 과감히 제거하고 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설의 관점을 오롯이 지지하는 이 소설은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앞세워 인생이 이토록 잔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채지은 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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