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정평가사 유재현(46ㆍ서울 마포구 서교동)씨는 아들 재현(16)군을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대안학교에 보낸다. 취학 전에도 학부모들이 기금을 모아 직접 마당과 놀이시설 등을 꾸민 공동육아시설을 이용했다. 가족과 함께 장을 보러 가는 곳은 마을 주민들이 세운 유기농 생활협동조합이다. 반찬도 주민들이 공동 운영하는 반찬가게에서 산다. 유씨는 마포일대 반경 2km 안에서만 방송되는 지역 라디오방송을 즐겨 듣는다. 자동차에 이상이 생겨도 주민들이 공동 운영하는 정비소를 이용한다. 유씨 가족에게 마을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다. 생활의 중심이다. 술자리 10번 중 8번은 마을 주민들과 어울릴 정도다. 유씨는 “우리 가족이 이용하는 시설은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운영하기 때문에 믿음이 간다”며 “아들 재현이를 키운 것도 7할은 마을공동체”라고 말했다.
#2. 중소기업 구내식당 영양사였던 박미현(46ㆍ여)씨는 3년 전부터 반찬가게 운영을 맡고 있다. 이 가게는 맞벌이를 하는 일부 주민이 품앗이 형태로 반찬을 나눠먹다가 “차라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반찬가게를 만들자”고 제안해 생겼다.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재료만 사용해 값이 비싼데도 주민들의 호응은 뜨겁다. 특히 일과 가사를 병행해야 하는 맞벌이 여성들 중에 단골이 많다. 1주일에 세 차례씩 반찬을 제공받는 가구가 30여곳이고, 부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주민도 100여명에 달한다. 박씨는 “정성껏 만든 반찬을 내 가족뿐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사는 주민들과 나누자는 취지에서 반찬가게를 열었다”고 말했다.
‘성미산 마을공동체’. 서울 마포구 도심의 야트막한 산 인근의 성산, 망원, 연남, 서교동 일대 600여 가구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이렇게 부른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공동체의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 운영 중인 마을자치기구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자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마을공동체에는 취학 전 아동의 육아를 책임지는 ‘우리ㆍ참나무ㆍ성미산ㆍ토바기 어린이집’과 취학 학생들의 방과후 활동을 책임지는 ‘풀잎새ㆍ도토리 방과후 교실’, 초ㆍ중ㆍ고를 통합한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 주민들에게 유기농 농산물과 반찬을 제공하는 생활협동조합 ‘두레생협’, 반찬가게 ‘동네부엌’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뿐 만 아니다. 주민문화센터 ‘꿈터’와 마을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까지 전달하는 1W의 소출력 라디오방송국 ‘마포FM’(100.7MHz), 자동차 정비소 ‘차병원’도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시설이 주민들의 기금으로 만든 조합 형태의 주민자치시설이라는 점이다. 기금을 갹출한 주민들이 조합원이 되지만, 그렇다고 이용 자격을 조합원만으로 제한하진 않는다.
성미산 마을공동체가 처음부터 이런 유기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출발한 것은 아니다. 자녀 양육을 고민하던 젊은 부모 30여 쌍이 1994년 각각 400만~500만원을 추렴, 60평대 단독주택을 구입해 어린이집을 열면서 마을공동체 활동이 시작됐다. 이 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모가 많은 점을 감안해 아이들을 저녁 7시까지 돌봐줬고, 일부 부모는 아예 보육교사로 참여했다.
이웃의 자녀를 자기 자식처럼 돌봐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곳에 자녀를 맡기기 위해 경기 안산, 분당 등지에서 이사를 오기도 했다. 정원이 넘쳐 자녀를 맡기지 못한 부모들이 또 다른 공동육아시설을 세우면서 성미산 마을공동체에는 4개의 어린이집이 생겨났다. 공동육아로 키운 아이들이 하나 둘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한 99년엔 방과후 교실을 열었다.
가족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자는 주민들의 제안으로 2001년 두레생협을 세웠고, 마을 주민과 어린이들의 건전한 문화생활을 위해 2002년 주민문화센터 꿈터를 열었다. 이 곳에선 요가 태껸 자전거타기 기타연주 공예 등 각종 취미교실이 열린다. 문화센터 강사도 주민들이 직접 맡는다. 전국태껸대회에서 우승한 아빠가 태껸강사를, 미술대학을 나온 엄마가 공예강사를 맡는 식이다.
2004년에는 “아이들을 공교육의 짜여진 틀에서 키우기 보다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뛰어 놀 수 있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아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를 세웠다. 학부모 겸 교사로 활동 중인 주민도 4명이나 된다. 최근엔 정부 지원을 받아 지역 라디오방송국까지 열었다.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한 시설들을 하나씩 갖춰 나간 셈이다.
성미산 학교 행정실장 양도호(44)씨는 “마을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의 단위는 가족이 아니라 마을”이라며 “주민들끼리 교류가 잦다 보니 이웃집 숟가락 숫자도 서로 알 정도”라고 자랑했다. 그는 또 “급속한 저출산ㆍ고령화 진행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려면 가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육아와 노인수발 등 가족의 부담을 국가와 기업 등에서 덜어줘야 한다”면서 “성미산 공동체에선 마을 주민들이 육아와 교육, 가사의 일부를 떠맡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들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ㆍ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사진ㆍ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주고 받아 훈훈한 ‘봉사 품앗이’
‘레츠(LETSㆍ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1,500개 단체 10만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 대안화폐 운동이다. 당초 실업자들이 자신의 노동력과 기술을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하고 대안화폐를 받은 뒤, 필요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제도로 출발했다. 이후 거래 품목이 육아와 노인수발 등으로 확대되면서 가족문제를 지역공동체 차원에서 해결해주는 수단으로 떠올랐다.
국내에선 1998년 3월 시민단체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FM(Future Money)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첫 닿을 올렸다. 이후 불교 환경교육원의 두레, 녹색연합의 작아장터, 대전의 한밭레츠, 구미의 사랑고리은행 등 10여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 중 한밭레츠, 과천 품앗이, 사랑고리은행 등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2004년 발족한 사랑고리은행은 400여명의 회원들이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을 꾸리거나 노약자 등 환자를 돌보는 활동을 하고 있다. 1시간의 봉사활동은 ‘1고리’로 간주돼 20여개 가맹점에서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다. 특히 환자를 돌보는 전문 봉사자들의 경우 사랑고리를 현금화할 수 있어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다. 이원재 사무국장은 “지방에 노약자들을 돌볼 전문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지역공동체 안에서 서로 돕자는 취지로 활동을 시작했다”며 “거동이 가능한 70대 노인들도 다른 노약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해 주는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0년부터 7년째 지속돼 온 한밭레츠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지역 대안화폐 운동이다. 회원 수가 600여명으로 가장 많다. 회원들은 대안화폐인 ‘두루’를 사용해 농산물이나 가사활동 등을 거래한다. 특히 의료 생협인 ‘민들레 의원’은 회원들이 모은 두루를 진료비 대신 받는 등 레츠를 지탱하는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두 달에 한 번씩 각자 준비해온 먹거리를 함께 즐기는 품앗이 만찬, 회원들이 보유한 다양한 기술과 능력을 강좌 형식으로 전수해주는 품앗이 학교, 가까이 사는 회원끼리 상부상조 하는 동네 품앗이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과천 품앗이는 ‘가족친화 공동체’로 발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레츠로 평가된다. 거래 품목은 자녀 학습, 예ㆍ체능, 먹거리, 육아, 가사, 이ㆍ미용, 카풀 및 차량 수리 등 비교적 단순한 내용부터 의료, 다도, 편집, 세무 등 전문적인 품목까지 망라한다. 회원들은 1시간의 노동을 제공하고 ‘1만 아리’의 지역화폐를 받은 뒤 자신에게 필요한 품목을 구입한다. 과천 품앗이 운영자 정해련씨는 “학습 품앗이의 경우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 날 정도로 인기가 좋다”며 “회원들에게 전문적인 일을 배워 재취업을 하는 주부들도 종종 있다”고 자랑했다.
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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