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는 연말 연초의 분위기 중 하나가 달력을 주고받는 일입니다. 경기가 팍팍하게 느껴지는 해는 주고받는 달력 인심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올해 여러분들의 달력 인심은 어떠했는지요?
● 달력에 적힌 '꿈의 날'과 '삶의 날'
나는 누군가로부터 달력을 받을 때마다 대관령 아래 산골에 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벌써 연말이면, 또 해가 바뀐 연초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릉 시내의 이런저런 가게에서 달력을 얻어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한 장짜리 달력이지요. 고무신가게, 포목점의 달력입니다. 1년 356일, 열두달이 2절지 크기만한 종이 한 장에 다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얻어오는, 제대로 모양 갖춘 달력이 1ㆍ2월, 3ㆍ4월 하는 식으로 두 달을 한 장씩에 인쇄한 달력인데 이건 보통 시내 양복점의 달력들입니다. 아주 좋은 달력은 은행에서 얻어오는 달력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은행의 고객으로 얻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친척 중에 누가 은행에 다니는 사람이 있어 정말 힘들게 하나를 얻어오는 것이지요.
그렇게 얻어온 달력 중에서 어른들이 좋아하는 달력과 어린 우리가 좋아하는 달력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멋진 그림이 인쇄되어 있는 달력이 좋지요. 외국의 멋진 풍경들, 또는 명화가 인쇄되어 있는 달력은 당연히 우리 방에 걸립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하는 달력은 큰 글씨에 음력 날짜들까지 나온 달력입니다. 그날그날의 어떤 메모까지도 가능한 달력이지요.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의 제삿날과 대소사를 미리 적어놓습니다. 또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집안의 어떤 중요한 일들을 달력의 커다란 날짜 아래 빈칸에 적습니다.
거기에 주로 적는 내용들은 이런 것입니다. '며칠 날 소를 사왔다' '며칠 날 소를 팔았다' '며칠 날 쌀 몇 가마니를 팔았다' '며칠 날 누구 교납금을 주었다' '오늘 열무를 뽑아 시장에 나가 판 돈 얼마'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달력이 가계부이기도 하고, 메모장이기도 하고, 또 말 그대로 달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나도 예전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그날그날의 일들을 달력 위에 적습니다. '어느 출판사와의 약속' '어느 잡지사에 넘겨야 할 원고 내용, 그곳 전화번호, 담당자 이름' '내가 참석해야 할 행사' 같은 것들입니다.
어린 날엔 달력의 모든 날들 모두가 '꿈의 날'들인 거지요. 달력에 인쇄되어 있는 좋은 풍경 속의 나라에도 가보고 싶고, 또 연예인의 얼굴이 나온 달력이라면 매일 그것을 바라보며 나 자신도 얼른 자라서 그런 선남선녀가 되는 꿈을 꾸지요. 그러다 달력에 이런저런 메모를 적기 시작하면서 그 '꿈의 날'들은 어느새 '삶의 날'들로 바뀝니다.
● 새해는 나날이 아름답고 희망차기를
나는 지난 몇 해 동안의 달력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 달력을 걸면 묵은 달력은 버려야 하는데, 빽빽하게 메모가 되어 있는 그 묵은 달력들이 마치 그동안 내 삶의 기록 같아서 벌써 몇 년째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하루 남았습니다. 지난해 여러분의 달력엔 어떤 꿈들과 어떤 삶들이 기록되어 있는지요? 그리고 바꾸어 거는 새 달력엔 어떤 꿈들과 어떤 삶들이 계획되어 있는지요? 나는 지금 벽에 걸어놓은 새해의 빈 달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지만 저 날들도 무수하게 많은 일들로 가득 차게 되겠지요.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 시간입니다. 내 삶이 나날이 아름답기를 기도하듯 여러분의 삶도 나날이 아름다우며 희망차기를 바랍니다. 근하정해!
이순원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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