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아내와 함께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경배(47)씨는 ‘대한민국 평균가장’이다. 그는 고2 아들과 중1 딸을 뒀고, 서초동의 28평 짜리 아파트형 빌라에 산다. 올해 월평균 소득은 약 300만원. 한국일보가 29일 통계청에 의뢰해 뽑아본 ‘2006년 평균 가구주’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씨는 1988년부터 서울 강남지역에서 18년째 슈퍼마켓 주인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올해처럼 1년 내내 한숨과 울분으로 힘겹게 보낸 적은 없었다. “18년 통틀어 올해가 가장 어려웠어요. 매출이 지난해보다 20~30% 가량 줄었거든요. 물건은 안 팔리는데 인건비와 세금은 늘어나니 도리가 없지요. 양주 사던 사람들도 요새는 소주를 사가요.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으로 가계부 적자를 메우고 있습니다.”
성격이 활달해 전국 슈퍼마켓 업주들의 단체인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회장도 맡고 있는 그는 “올해 처음으로 장사를 계속 해야 할 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면서 “대표가 이러니 일반 업주들은 어떻겠습니까”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두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유통시장 개방으로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기 시작한 96년과 외환위기가 엄습한 97년이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우후죽순 들어서는 할인점 때문에 슈퍼마켓이 어려워진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외환위기 때는 오히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카드대란과 주5일제 시행이 겹치면서 장사는 계속 내리막이다. 그는 “부작용은 생각치 않고 전략 없이 유통시장 개방을 밀어 부쳤기 때문”이라며 정부를 원망했다.
주변에선 그래도 서초동에 집이 있으니 돈을 좀 벌었으려니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다같이 올랐는데 무슨 소용이 있나요. 평수가 작은 빌라형이라 팔아봐야 근처에 옮길 데도 없어요.” 오히려 천정부지로 솟은 아파트 값 때문에 집을 넓혀갈 기회가 사라져 스스로 중산층이라 여기던 자부심만 꺾였다.
“중산층이면 영화감상이나 여행 같은 최소한의 문화생활은 가끔 누려야 하지 않나요. 한달 수입의 반이 애들한테 들어가니 한해가 다 가도록 영화 한번 못 봤어요. 며칠 전 아들놈이 세 달치 학원비 120만원을 엄마 카드로 긁고는 ‘돈을 너무 많이 써 미안하다’는 휴대폰 문자를 보냈습디다. 애들도 부모의 고통을 아는 거지요.”
그는 정치권에 꼭 한마디를 하고 싶단다. “선거 때만 찾아오지 말고 평소 서민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일해 달라”는 것이다. “방법은 알면서도 자기 일이 아니니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선 대통령이나 여야 의원 모두 똑같지요.”
부동산 광풍과 경기침체, 사회적 갈등과 충돌로 서민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았던 2006년. 힘들었던 한해를 묵묵히 견뎌온 보통 사람 김씨는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만 있으면 어떻든 견딜 수 있지 않겠어요. 내년에는 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민생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를 뽑아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습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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