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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리말 해침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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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우리말 해침꾼

입력
2006.12.2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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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사회에 가보면 영어단어를 많이 섞는 독특한 말투를 듣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파킹 랏(parking lot)에서 그 자랑 한참 아규(argue)했지. 하도 컴플레인(complain)하길래 수(sue)하라고 했어.

애니웨이(Anyway), 쿨(cool)한 줄 알았는데 아주 더리(dirty)한 자더군." '번역'하자면 "주차장에서 그 자와 한참 논쟁을 했지. 하도 불평하길래 고소하라고 했어. 어쨌든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주 지저분한 자더군"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영어단어 사용빈도와 진짜 영어실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 시민단체에서 올해의 '우리말 해침꾼'으로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를 선정해 화제가 됐다. 개그맨 등의 흉내로 더 자주 듣게 되는 그 특유의, 혀를 굴려 "음…, 판타스틱하고 엘레강스해요"하는 식의 말투 때문이다. 매체 노출이 잦은 유명인들의 언행은 그 파급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적절한 선정이다.

사실 재미동포들의 어법이야 생활여건 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우리 땅에서 듣는 지나친 외국어 섞어쓰기는 거북하다. 심지어 "웁스!(Oops!)"하며 놀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드물지 않은데 그야말로 닭살이 좍 돋는다.

▦ 문화적 국경이 사라져가는 세계화 추세 속에서, 또 새로운 개념·용어·기기 등이 매일 정신없이 등장하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영어단어 사용의 확대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과 관련이 없는 일상의 형용사까지 영어로 대체되는 현상은 다른 문제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은 대개 다른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꾸밈어의 풍부함과 그 다양한 쓰임새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심각하다. "그는 깔끔하고, 산뜻하고, 똑 부러지고, 말쑥하고, 바르고, 속 깊고… …." "그러니까 그냥 쿨하다는 거네."

▦ 하지만 이보다 더 우리말을 망가뜨리는 것은 '분노의 언어'들이다. 올 한 해 내내 정치인이건, 언론이건, 네티즌들이건 모두가 증오와 분노로 시퍼렇게 날 벼린 말들로 얼마나 서로에게 상처를 입고 입혀 왔던가.

그러고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격정발언'은 한 해의 걸맞은 마무리인 셈이다. 일찍이 빅토르 위고가 그랬던가.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울수록 바탕은 초라한 법이라고. 세모에 누더기처럼 해진 우리 말을 늘어놓고 보는 심정은 참담하다. 앙드레 김씨라면 그럴 것 같다. "새해엔 제발 말이라도 좀 엘레강스하게 해요."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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