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동안 예술실험을 멈추지 않은 81세의 노대가는 지금 몸이 불편하다. 올해 제작한 작품에는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쓴 서명이 보인다.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로버트 라우셴버그 전을 찾은 관객들은 전시장에 걸린 28점의 작품을 하나하나 보다가 이 서명 앞에서 숙연해진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미국 팝아트의 산 역사다. 앤디 워홀 등의 미국 팝아트가 만발하기 전, 추상표현주의가 휩쓸던 1960년대에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엄숙함에 반기를 들고 일상적인 이미지와 사물을 화면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팝아트의 물꼬를 텄다.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 등 후배 팝아트 작가들이 인기 스타, 코카 콜라, 만화 캐릭터 등 대중문화의 가벼움을 즐긴 것과 달리, 그는 일상성을 애용하면서도 내향적이고 논리적인 작품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이룩했다. 도로표지판, 상점 간판, 거리 풍경 등 일상적인 이미지로 미국적인 삶을 표현하고 해석한,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꼽힌다.
무엇보다 그는 장르간 경계를 허문 선구자다. 그림과 사진을 결합한 ‘컴바인 회화’를 비롯해 사진을 조각으로 만들고, 조각에 사진을 붙이는 등 모든 경우의 수를 실험했다.
재료와 기법 실험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알루미늄ㆍ구리ㆍ종이ㆍ플라스틱ㆍ녹슨 철ㆍ실크스크린ㆍ아크릴ㆍ에나멜ㆍ식물성염료 등 온갖 재료를 사용했다. 표현 기법도 그리기, 뿌리기, 흘리기, 실크스크린 등 다양하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다채로운 실험을 한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라우셴버그 개인전은 이번 전시가 국내 처음이다. 그동안 단체전에 끼어 조금씩 소개되곤 했다. 1970년대~2000년대 그림을 가져왔다. 그가 금속성 표면의 질감과 반사에 매혹된 시기다. 대부분 빛나는 금속 소재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들이어서 관객의 모습이 작품에 어른어른 비친다.
알루미늄 판 표면을 거울 처리하고, 그 위에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이미지를 찍거나 아크릴로 채색하는 등의 기법을 썼다. 최근 4년 간의 작업인 <시나리오> 연작은 그가 활동하고 살았던 뉴욕과 플로리다의 모습을 한 화면에 이미지를 겹치거나 조각조각 떼어 구성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시나리오>
그는 작품 가격이 가장 높은 생존 작가 10인에 드는 인기 작가이기도 하다. 1997년 뉴욕구겐하임미술관이 사상 최대 규모의 라우셴버그 회고전을 연 데 이어, 현재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순회 중이다. 전시는 1월 7일까지 한다. (02)734-6111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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