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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세밑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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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세밑 단상(斷想)

입력
2006.12.2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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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의 일곱번째 해가 저물고 있다. 나토군의 베오그라드 공습이 지난 천년을 마무리했듯, 새 천년의 첫 일곱 해도 포연으로 맵싸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핏물이 땅을 덮고 신음이 하늘을 내리눌렀다.

한반도 둘레에도 전운이 오락가락한다. 하기야, 인류 역사에서 전쟁 없었던 세월이 얼마나 되랴. 다만, 언제부턴지 모든 전쟁의 전면이나 배후에 꼭 한 나라가 으스스하게 버티고 있더라는 것이다. 전쟁을 포함한 국제정치의 전개가 늘 차가운 국가이성의 함수만은 아니다.

힘센 개인의 변덕스러운 욕망은 합리적으로 계산된 국가전략이나 집단전략을 사소한 계기로 교란시키며 역사의 진행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 <부시의 정신분석> 이라는 책이 쓰여진 것도 이해할 만하다.

● 21세기 첫 7년도 포연으로 얼룩져

50년 냉전에서 살아남은 이 세기의 인류가 지난 세기의 인류보다 더 살 만한 세상을 보게 될지는 미지수다. 신자유주의 물살이 인류를 양극화의 낭떠러지로 밀어붙인다고 좌파는 투덜대지만, 거기 맞선 방수차(防水車)는 평등주의 인터내셔널의 연대의식에서보다 민족(국가/국민)주의자들의 집단적 자기애에서 더 효율적인 연료를 얻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자들의 자기애는, 그 자체가 흔히 전쟁의 유혹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못지않게 성마른 인화물질이다. 부시 주니어 시대의 미국 지배계급은 편리하게도 그 둘 다를 만지작거린다. 소위 신보수주의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장원리가 미국(이나 이스라엘)에 불리하다 싶으면 언제라도 내팽개치고 주먹을 휘두를 준비가 돼 있는 극우 내셔널리즘이다.

무릇, 세밑은 내성(內省)의 철이다. 며칠 새에 읽은 책 두 권의 독후감으로 그 반성을 갈음하고 싶다.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 와 사이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 . 요네하라 마리는 러시아어 통역사로 일하다 지난봄 56세로 작고한 일본인이다. 일본공산당 간부를 아버지로 둔 그녀는 1960년대 전반부를 체코 프라하의 옛 소련학교에서 10대 소녀로 보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 는 중년의 요네하라가 서로 다른 국적의 옛 급우 셋을 찾아 헤매는 여정에다 학창시절 회고를 포개놓은 수기다. <영어의 탄생> 의 원제는 <만물의 의미> 다. 그 부제 ' <옥스퍼드영어사전>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는 19세기 후반부에서 192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언어사전이 만들어지는 71년 세월을 그렸다.

<프라하의 소녀시대> 는 패배의 이야기다. 그 주인공들이 소녀 시절 신봉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퇴각이 이 책의 배음(背音)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패배의 이야기는 자잘한 승리의 삽화들로 짜여져 있다. 그 승리는 기품, 우정, 엽관(獵官), 치정, 치부(致富) 같은 이름을 지녔다.

<영어의 탄생> 은 승리의 이야기다. 1928년 4월19일, wise와 wyzen 사이의 표제어들을 수록한 64쪽짜리 최종 분책이 나오면서 <옥스퍼드영어사전> 초판이 마침내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XYZ 부분은 작업이 비교적 수월해, 그보다 7년 전인 1921년에 발간됐다.) 이 승리의 이야기는 수많은 패배의 삽화들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 사전의 완간 가능성과 상업적 전망을 의심하던 주변의 힘있는 참견꾼들과 훼방꾼들에게, 사전편찬자들은 날마다, 자잘하게,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승ㆍ패, 미ㆍ추가 만들어가는 역사

언론인 홍세화씨는 어느 자리에선가 사람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한숨지은 바 있다. 이런 비관적 인간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정치적 보수주의의 수면(水面)에서 자맥질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홍세화씨는 어기찬 진보주의자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욕망)이 복합적이라는 뜻일 테고, 그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 풍경 역시 겹겹이라는 뜻일 테다. 그 물렁물렁한 중층성 속에서 승리와 패배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깍지끼며 인간의 역사를, <프라하의 소녀시대> 와 <옥스퍼드영어사전> 을 근근이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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