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8일 개막한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현 단계에서 핵무기 문제를 논의코자 할 경우 핵군축회담 진행요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이날 베이징(北京)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전체회의 수석대표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전 주석의 유훈이자 북한의 최종 목표”며 이같이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기조연설에서 “핵 폐기 실행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모든 것(상응조치)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북측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핵 폐기 초기조치와 5자 당사국의 상응조치를 논의키로 한 이번 회담이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김 부상은 또 “미국이 금융제재 해제 및 9.19 공동성명 이후 시행된 유엔제재 등 대북 제재를 해제해야 공동성명 이행방안 논의 개시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부상은 이어 조건이 성숙할 경우 현존 핵 프로그램 포기 논의가 가능하다며 ▦미국 내 북을 적대시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 철폐 ▦유엔 제재 등 모든 제재 해제 ▦핵 프로그램 포기를 위해 경수로 제공과 완공 시까지 대체에너지 공급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부상은 이와 함께 “제제 압력이 강화되고 지속될 경우 핵 억지력 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사실상 핵실험 재개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협상 시작단계에서 최대치의 요구 안을 낸 것”이라며 “협상과정에서 조정이 가능한 안으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은 기조연설을 통해 핵동결-신고-검증-폐기 등 전체 핵 폐기의 과정을 몇 단계의 큰 묶음으로 나눠 이행하는 패키지식 접근방안을 제안했다. 천 본부장은 “이번 회담은 수개월 내 이행할 초기조치 내용에 합의하고, 공동성명의 전면적 이행 시한과 작업계획을 결정하는 게 핵심과제”라고 말했다. 천 본부장의 제안에 미국과 일본도 공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北, 핵보유국 인정 요구 '예상된 강공'
북핵 6자 회담 성공여부의 키를 쥐고 있는 북한과 미국이 18일 회담 개막 기조연설을 통해 각각 협상전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대로 북미 양측은 서로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핵 폐기 조치에 앞서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북한과, 핵 폐기 실행의지가 확인될 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미국의 전략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이에 따라 향후 협상에서 접점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고개를 들고 있다.
북측의 기조연설엔 각국의 이목이 집중됐다. 회담의 실질적인 풍향을 알 수 있는 가늠자이기 때문이다. 북측의 핵 폐기 의지와 요구수준에 따라 핵 폐기를 위한 기반조성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북측은 이날 과거 미국에 대해 문제 삼았던 내용에서부터 9ㆍ19 공동성명 수준을 넘어선 요구까지 거침없이 쏟아냈다.
첫번째로 기조연설을 한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이번 회담을 핵 군축회담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사실 북한이 이렇게 나오리라고 미리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김 부상은 아울러 미국이 원하는 대로 9ㆍ19 공동성명 이행방안을 논의하려면 금융제재가 해제돼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런 조건이 충족될 경우엔 북한을 적대시 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철폐와 모든 제재의 해제는 물론이고 공동성명 내용을 뛰어넘어 경수로 제공과 함께 완공 시까지 대체에너지 공급이 필요하다고 했다.
북한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회담 전부터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최대 수준의 요구치를 내놓아 반대급부를 최대한 챙기려는 전략이다. 핵 실험 후 북한이 순순히 회담 재개에 응한 것도 핵 보유국 지위요구를 앞세워 회담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을 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정부 당국자는 “그 동안 북측이 주장해 왔던 모든 요구사항을 백화점 식으로 나열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를 북측의 물러설 수 없는 요구수준(Bottom Line)으로 볼 수는 없다. 정부 당국자는 “북측이 협상 시작 때마다 하는 의례적인 형식”이라고 평가했다.
때문에 회담 전망을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지금의 수준이 신축성 있는 요구사항(Open Position)이라면, 북측의 물러설 수 없는 요구수준이 무엇이냐가 협상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반면 미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의 핵 폐기 실행의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반도 비핵화 없이 보상(상응조치)도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힐 차관보는 그러면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 달성 시에는 미북 관계정상화를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회담에 정통한 베이징의 외교소식통은 “북미 상호간의 전략적 지향점이 너무나 다르지만 협상이 본격화하는 20일 이후 타결 가능성에 대한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이징=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한국이 제안한 '패키지식 접근방법'은
18일 개막한 5차 6자회담 2단계회의에서 우리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이 ‘패키지식 접근방법’이라는 ‘회담 틀’을 제시, 북한을 합의의 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노림수를 던졌다.
패키지식 접근 방법이란 전체 핵폐기 계획을 몇 단계의 큰 묶음으로 나누어 이행하자는 것. 이번 6자회담은 9ㆍ11공동성명에 기초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핵폐기와 이에 상응한 북측에 대한 구체적 보상 조치를 결정하는 것이 주 의제이다. 우리측의 제안은 최소 2년 이상 걸리는 핵동결-신고-검증-폐기라는 핵 폐기 전 과정을 일괄 타결하는 대신 일단 초기 단계와 나머지 단계들을 각각 분리해 합의하자는 것. 천 본부장은 “초기단계 조치 이행과정 동안 그 다음 단계로부터 핵폐기 완료시점에 이르는 행동계획 전체를 완성 합의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측이 이 같은 제안을 한 가장 큰 이유는 협상의 효율성을 높이고 예상되는 북한의 전략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다. 각 단계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북측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이 중단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한편, 회담의 목표가 ‘핵폐기 과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이중 포석인 셈이다. 천 본부장은 “북측의 의무사항과 상응조치의 수순을 결정하고 이를 조합하는데 있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엄격히 기계적으로 적용해 모든 조치를 1대 1로 연계하려 할 경우 합의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고 한가지 조치의 지연에 이행과정 전체가 볼모가 되는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기조연설에서 북한은 자신들이 요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함으로써 이 같은 우리측의 우려가 현실화됐다. 천 본부장은 “매 패키지마다 엄격한 상호주의와 손익계산에 집착하는 것은 소탐대실이 될 수 있다”고 각국에 융통성을 발휘해 줄 것을 촉구했다.
우리측의 이 같은 제안은 지난 11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한미일 수석대표 협의를 통해 합의된 3국의 공통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태희기자 goodnews@hk.co.kr
北, 南측과 접촉도 거부
18일 베이징(北京) 댜오위타이(釣魚臺) 내 팡페이위안(芳菲苑)에서 6자 회담이 공식 개막했지만 북한의 이틀째 협상 거부로 회담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무거운 분위기는 우다웨이(武大偉) 중국측 수석대표의 오전 회담 개막 인사를 통해 예고됐다. 그는 “논의할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하며 우리의 사명은 영광스럽고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 일본, 한국, 러시아, 미국, 중국 등의 순으로 기조발제가 시작됐다. 북한은 최대치의 요구들을 나열했고, 일본은 납치자 문제 해결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한국은 핵 폐기를 위한 ‘단계적 접근’방안을 역설했다. 미국도 북한 핵 폐기 의지를 강조하는 종전 입장을 되풀이했다. 각국 대표단은 상대방 주장에 섞인 ‘진짜 패’와 ‘가짜 패’를 구분하는데 진력했다.
파란은 기조연설 후 오후 시작된 양자접촉부터 시작됐다. 17일 미국과의 사전 접촉을 회피했던 북한은 이날 미국은 물론 한국과의 만남도 거부했다. 한 관계자는 “접촉을 제의했지만 북쪽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북측 대표단이 이날 오후 4시 10분쯤 회담장인 댜오위타이를 떠나 숙소인 북한 대사관에 들어간 것으로 미뤄 양자접촉이 시작된 오후 2시 이후 2시간 동안 회담장에 있으면서 접촉을 피한 것으로 관측된다. 회담장 주변에서는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동결계좌 해결을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으려는 북한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BDA 올인’ 전술을 쓴다”는 분석도 나왔다.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간 북측 대표단은 이날 밤 늦게까지 두문불출했고 북측을 제외한 채 양자접촉을 진행했던 한국, 미국 대표단 등은 북한과의 접촉 가능성을 일찍 접고 19일 상황에 대비했다.
이에 따라 이르면 19일 열릴 BDA 실무협의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예상대로 실무회의가 열릴지, 오광철 조선무역은행 총재가 북측대표로 참가할지 등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한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오전 회담장 앞에 도착할 때 자신이 광적으로 응원하는 보스턴 레드삭스에 최근 입단한 일본인 투수 마쓰자카의 원 소속팀인 세이부 라이언스 야구 모자를 썼다. 천영우 한국 수석대표의 경우 개인적 소망인 ‘영상 자료 화면’ 교체에 성공했다는 농담이 나왔다. 올 2월 천 대표가 송민순 현 외교부장관으로부터 대표직을 넘겨받은 뒤 회담이 안 열려 최근 언론에 수석대표 시절의 송 장관 모습이 자주 보도됐기 때문이다.
베이징=이영섭 특파원 younglee@hk.co.kr
BDA협상 어떻게 될까
“금융제재 문제가 기본이다.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6자회담은 의미가 없다.” 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 참석 중인 북한 관계자는 18일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지난해 9월 이후 북미 갈등의 중심에 있던 마카오 소재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계좌 동결 문제가 이번 회담에서도 최대 논쟁거리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한 발언이다.
19일 시작되는 실무협의 대표단 면면도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낳고 있다. 북한은 BDA 관련 북미협상을 담당했던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 대신 오광철 조선무역은행 총재가 나선다. 오 총재는 우리의 수출입은행 격인 조선무역은행을 책임지는 40대 테크노크라트로 알려져 있다. 대외무역 결제시스템을 꿰고 있는 금융전문가를 파견한 것은 BDA 문제를 정치적 흥정이 아닌 실무협상을 통해 처리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돼 긍정적이다.
이에 맞서는 미국 대표는 대니얼 글레이저 재무부 테러 및 금융범죄 담당 부차관보다. 북한의 위조지폐 제작, 불법자금 돈세탁 혐의 조사 실무작업을 총괄했던 그의 업무 특성과 그 동안의 강성 발언을 감안할 때 협의는 녹록치 않을 전망이다. 특히 “BDA 문제 해결 없이 6자회담 진전은 없다”는 북한과 “일단 대화는 하지만 제재 해제는 약속 못한다”는 미국간 기본적인 입장차도 쉽게 좁혀지기 어려운 부분이다.
물론 타협 가능성도 엿보인다. 2,400만 달러에 달하는 BDA 북한 계좌 동결은 액수 자체보다는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북한은 BDA 제재를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상징하는 조치로 여긴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선에서 합법계좌를 선별적으로 풀어준 뒤 금융시스템 투명화 부분에 대해 양국이 추가 논의를 하는 방법으로 타협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 미 일간지인 시카고 트리뷴은 “미 정부가 동결된 2,400만 달러 가운데 1,200만 달러는 불법 활동과 관계 없는 것일 수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정부 소식통은 “북핵 폐기 문제가 이번 회담의 핵심인 만큼 곁가지인 BDA 실무협의가 조용히 진행되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BDA-北 자금거래 액수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아"
미국이 북한의 돈세탁 창구로 지목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가 지난해 수천만~수억달러를 북한과 거래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8일 보도했다.
이 신문이 단독 입수한 BDA 은행거래 자료에 따르면 BDA는 북한 금괴 매입을 포함해 예상보다 훨씬 더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문은 그러나 이 자료가 북한의 BDA와 거래 중 적법한 것도 많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지난해 9월 ‘BDA가 북한의 돈세탁 창구’라며 이 은행 자금 2,400만달러를 동결한 미국 정부에 이에 대한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하라는 압력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에 따르면 동결자금 2,400만달러의 3분의 1 가량인 700만달러는 평양 대동신용은행이 사용하던 계좌에 묶여있다. 이 은행은 올해 영국 금융자문사 ‘고려아시아’에 인수됐다.
FT의 은행거래 자료에 따르면 대동신용은행은 지난해 1~9월 BDA를 통해 4,926만달러를 송금했다.
대동신용은행의 동결자금 700만달러 중 절반 가량은 영국 담배업체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BAT)’와 태성무역의 담배 합작회사 자금이다.
자료에는 BAT가 합작회사 계좌와 독자 계좌를 통해 1,470만달러를 싱가포르 시티뱅크, 홍콩 HSBC 등에 보낸 것으로 돼 있다. 이 자금에는 7월 230만달러, 8월 290만달러가 포함돼 있다. 대동신용은행 계좌도 북한의 BDA를 통한 거래로 본다면 이 자료는 이 은행을 통해 더 많은 자금이 거래됐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콜린스 맥아스킬 회장 등 고려아시아 소유주들은 대동신용은행을 통한 거래가 적법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송금 세부내역을 미 국무부와 재무부에 보냈다. 하지만 맥아스킬 회장은 “미 당국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미 재무부는 16개월 동안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돈세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무부는 금융조치가 핵 문제와 별개라고 말해왔다.
권대익 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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