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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검은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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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검은 소묘

입력
2006.12.1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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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운 화백. 그는 민족미술인협회 최초의 직선 회장을 맡고 있지만 자칭하기는 "잊혀진 화가"다. 대학교수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데 남들은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라 부른다.

사람좋아 푼수로 불리는 인사동 문화인들의 실체는 없는 조직, 전푼련의 고문이 신경림 시인이라면 그는 대표인 셈이다. 지난 14일 '검은 소묘'라 이름 붙인 여 화백의 개인전이 열린 인사동은 20년 만에 한자리에서 보는 그의 그림이 궁금해 찾아온 이들, 화가 사진작가 평론가 등 미술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인 소설가 등 그와 친분있는 문인들로 오랜만에 북적이는 듯했다.

100여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뒤풀이 장소에서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자칭 '잊혀진 화가'를 돌아온 탕아처럼 축하하는 모습은 화단 혹은 문단 할 때의 그 단(壇)이란 말이 서먹해진 요즘 문화계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따져보면 20년 만이라지만 실상 여 화백의 이번 개인전은 그의 화력 50여년 만의 첫 본격 개인전이다. 신경림 시인이 그의 이번 전시회 도록 서문에 쓴 것처럼 "그는 남이 다 고생할 때 예술을 핑계로 혼자서 영광과 행복을 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배들 후배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늘 앞자리를 양보한 결과가 오늘의 늦은 개인전으로 되었으니 이는 아름다운 일이지 결코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나이 차가 훌쩍 나는데도 여 화백이 평소 즐겨하는 표현대로라면 "인연법에 이끌려" 벌써 몇 년을 넘게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떠나 스스럼없이 지내오면서도 언뜻언뜻 그의 그림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 전시장인 아트싸이드 화랑에 들어서면서 떠오른 생각은 "그 사람이 곧 그 그림"이라는 거였던 같다. 오방색을 써서 해학 넘치는 민화풍으로 통일을 기원한 판화 시리즈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의 이번 전시의 주조는 흑백의 풍경 그림들이다. 종이(한지)에 숯(목탄)으로 그린 이 땅의 산과 들과 길과 집. 가장 소박한 소재를 사용해서 가장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다.

전시회만 열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오랜 세월 결코 화가로서의 노동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그림에서 금방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지리산', 겸재가 양천 현감으로 있을 때 북한산을 그렸듯 실경산수의 기법으로 지금의 서울 모습을 그린 '선유도에서 본 북한산' 등 대작을 비롯해 담박한 옛 수묵산수를 보는 듯한 '마곡동 봄비', 그리고 바로 지금 역사의 현장인 평택 대추리 풍경까지. 마치 엊그제 내린 폭설이 쌓여있는 이웃한 산의 모습이 바로 저 그림이지 싶다. 그는 검은 숯과 그 나머지 하얀 여백만으로 50여년 만의 전시를 꽉 채우고 있었다.

언젠가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반 고흐를 보러 유럽을 돌았던 적이 있어. 그런데 옛날 청계천 헌책방에서 컬러로 된 일본 문고판을 구해서 보물처럼 들여다보곤 했던 그의 그림들을, 막상 눈 앞에서 보니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드는 거야. 여백이 없더라구. 너무 꽉 차 있는 것은 답답해."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해를 넘기는 심정은 언제나 그럴지 몰라도 우리 마음 속 풍경도 숯덩이로 그린 여 화백의 그림 같다. 하지만 평론가 최 민의 말처럼 "검정색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색"이기도 하다. 검게 탄 가슴을 틔우는 여백을 마련해야 할 때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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