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를 벗어 걸고 책상에 앉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린다. 미국이다. 무려 14시간의 시차. 밤 늦도록 전화기 앞에 앉아 그의 출근을 기다렸다는 태평양 건너의 목소리가 피로하다. “제 원고가 잘 도착했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는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넣으며 산처럼 우뚝한 원고더미를 바라본다. ‘저 더미 속에서 어떻게 이름을 찾으라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땅의 모든 ‘문청’들이 문학에의 열망으로 몸살을 앓는 12월. 위기, 침체, 죽음 따위의 단어가 아니면 수식어를 찾기 어려운 이즈음의 문학이 오랜만에 열정, 열망, 희열 등의 단어와 한 쌍을 이루며 복음처럼 희망의 기운을 퍼뜨리는 계절이다. 문학을 향해 띄운 그 수다한 연서들과 ‘러브콜’을 마치 제 것인 양 받고 있는 그는 그리하여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전화 주시겠습니까. 확인해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문청들의 연인이라도 된 듯 그 영광을 대신 누리는 자의 당연한 노무다. 이 계절 가장 인기 있는 그는 ‘신춘문예 담당자’다.
문학에 띄운 이 많은 연서들
12월 8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원고 접수가 마감됐다. 하지만 8일자 우체국 소인을 훈장처럼 새긴 봉투들이 11일에도, 12일에도 쓰나미처럼 몰아닥친다. 8일자 소인 원고가 11일쯤 도착하니 11일 방문접수도 유효하다는 나름의 유권해석으로 뒤늦게 원고를 들고 온 이도 있었다.
제 재주를 감추지 못하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손끝을 베는 날카로운 종이들. 그는 하얀 목장갑을 끼고 전동 봉투절단기로 저들의 봉인된 우주를 뜯는다. 수천개의 봉투를 뜯고 원고를 꺼내는, 단순하기 때문에 더없이 고된 이 반복노동은 그를 무념무상의 새하얀 세계로 이끈다.
그러다 툭. ‘호모 리테라리우스’(Homo Litterariusㆍ문학적 인간)로서의 인간본성과 직면하는 일의 숙연함이 뒷덜미를 친다. A4 용지에 단정하게 출력된 워드프로세서 원고부터 까만 끈으로 묶은 원고지 더미, 하얀 편지봉투에 담긴 줄 쳐진 편지지까지…. 이름과 주소와 장르와 제목이 순식간에 결합하며 지은이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놓는다.
안락사와 나르시시즘을 노래하는 도시의 여고생에게서 청년기의 건강한 우울을 읽고, 소중히 간직했을 네 잎 클로버를 겉표지에 붙여놓은 어느 중년의 응모자에게서 마음을 가득 채운 간절한 순정을 읽는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쓰게 했는지, 그들 모두의 사연이 그는 궁금해진다.
원고마다 사연 가득
미국의 한 교포는 “모국어를 잊을까 두려워 틈틈이 써온 시를 보낸다”고 했다. 마흔 아홉의 한 남성은 “작년 21년 고락을 함께한 아내를 보냈습니다. 그녀를 생각하며 쓴 시”라고 원고 밑에 애달픈 사연을 적어보냈다. 경북 영주의 초등학교 3학년 생이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썼다 지운 연필자국이 고스란한 동시가 그를 빙그레 웃게 하는가 하면, “컴퓨터에 익숙지 않아 잘못된 문법이 많이 나왔습니다. 졸필을 양해하여 주십시오”라고 편지를 따로 동봉한 70대 여성의 워드프로세서 원고가 그를 송구하게도 한다.
목포에서 수형생활 중이라는 한 응모자는 “담장 안 생활이 사회와 격리된 곳이다 보니 여러모로 힘든 점이 많습니다. 힘들 때마다 적었던 시가 있어 보내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당선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고, 참여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이곳에서 남은 시간 열심히 살아가렵니다”라고 적은 그는 정말로 주소조차 표기하지 않았다.
시, 소설, 동시, 동화 4개 부문 모두에 응모한 전방위 예비 작가들도 여럿이었다. 신춘문예 당선자가 원고를 제출해주면 붙는다는 속설이 있다며 동생의 응모작을 직접 들고 온 유명 작가도 있었다.
접수현황 및 심사일정
어느덧 밤 11시. 봉투를 벗고 장르별로 분류된 하얀 원고더미에 휩싸여 그는 원고 수를 세기 시작한다. 시 3,800여편, 소설 339편, 동시 660여편, 동화 196편, 희곡 91편. 모두 더하니 줄잡아 5,100여편이다. 다른 부문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나, 시 응모작이 지난해보다 30% 가량 줄었다.
심사위원의 책임강화를 위해 올해부터 전 부문에서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하는 심사는 12월 22일까지 한다. 당선자는 내년 1월1일자 지면을 통해 발표하지만, 당사자에겐 12월 23일을 전후해 개별 통지한다. 올해는 누구일까. 표지 위의 네 잎 클로버가 눈 앞을 스친다. 그러다 문득, 혹시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봉투 안에 쓸쓸히 남아있는 원고가 없는지, 그는 빈 봉투를 다시 한 번 뒤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일이 보낼 수 없는, 그 뜨거운 연서들에 대한 그의 소박한 답장이었다. 모두의 행운을 비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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