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통합법(이하 자통법)이 내년 상반기에 국회를 통과하면 기존 금융업계 판도에 거센 지각변동이 일어날 전망이다.
자통법은 증권사, 자산운용회사, 선물회사 등으로 엄격히 나뉘어져 있던 기존의 금융권 업종간 벽을 허무는 것은 물론 금융상품의 개발과 운용에 대한 규제도 대폭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또 이를 통해 증권업계의 인수ㆍ합병을 촉진해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 같은 초대형 투자은행(IB)을 육성해 이들이 장차 국내 기업금융을 견인하도록 한다는 구상을 깔고 있다.
은행-보험-금융투자회사 3두 체제로
증권사들은 자통법의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법 시행 이전의 유예기간 동안 일정한 시장진입 요건을 갖춰 금융투자은행으로 재인가를 받거나 등록을 마치면, 기존의 업무 외에 선물회사나 자산운용사가 하던 일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송금 결제 외국환업무 등 은행의 업무영역까지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예금과 원금손실 위험이 없는 전통적 보험상품을 제외한 모든 금융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 금융산업의 지도도 명실공히 ‘은행-보험-금융투자회사’의 3두 체제로 재편될 전망이다. 금융투자회사의 업무영역이 대폭 늘어나면서, 이들이 은행 및 보험사와 개인금융 시장에서 유사한 서비스와 상품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일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대형 증권사들이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자기자본을 늘려 규모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합자본시장을 놓고 자산규모와 영업망에서 월등한 은행이나 투자기간이 길고 다른 금융상품과의 접목이 쉬운 보험사와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몸집을 키워야 가능하다. 현재 금융투자회사 전환을 고려중인 증권사는 10곳 정도다. 업계에서는 국내 자본시장의 규모를 고려할 때 향후 4~5개 가량의 금융투자회사가 경합을 벌일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투자증권(우리은행) 대우증권(산업은행) 삼성증권(삼성생명) 굿모닝신한증권(굿모닝신한은행) 대한투자증권(하나은행) 등 주요 증권사는 은행이나 보험을 우군으로 확보하고 있는 터여서 자통법 시행 이후에는 이들 은행ㆍ보험계 증권사와 여타 독립증권사 간의 업무영역 분화도 예상된다. 영업망에서 이점을 갖춘 은행ㆍ보험계 금융그룹은 파생상품의 판매 등 소매부문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독립증권사들은 자기자본투자(PI)나 기업공개(IPO) 같은 투자은행 고유의 업무에서 활로를 찾을 전망이다.
자본규모와 마케팅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열세인 중ㆍ소형 증권사들은 수익이 낮은 브로커리지(중개)업무에 치중하거나 ‘틈새시장’을 뚫는 특화 전략을 택할 전망이다. 증권업협회 이정수 이사는 “자통법 이후의 무한경쟁 속에서 중ㆍ소형사가 대형사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하지만 중ㆍ소형사 입장에서는 업무영역과 상품 종류가 늘어나면서 ‘틈새시장’ 선택의 폭이 넓어지므로 자통법 시행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통법, 무슨 내용 담겨있나
자통법이 시행되면 일반투자자들은 지금보다 폭 넓은 금융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선 금융투자회사에 계좌를 개설하기만 하면, 주식 선물 펀드 파생결합증권 등 다양한 금융상품 투자는 물론 별도의 은행거래 없이도 카드대금 결제와 공과금 납부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권유 대행자’ 제도 도입으로 투자상품 가입을 위해 금융기관을 찾는 수고를 덜게 된 점도 기억해 둘만 하다. 고객은 투자권유 대행자를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불러 충분한 설명을 듣고, 가입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금융상품의 종류도 대폭 늘어난다. 지금까지는 증권, 선물 등 운용ㆍ판매 가능한 금융상품의 종류를 법에서 일일이 열거하였지만, 앞으로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모든 금융상품이 금융투자상품으로 인정되는 까닭에 다양한 새 상품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펀드의 투자대상 자산 제한도 폐지된다. 지금까지는 펀드의 종류별로 증권, 파생상품, 부동산, 실물, 어음 등 투자대상 자산의 종류가 제한돼 있었지만, 이 법이 시행되면 단기금융펀드(MMF)를 제외한 모든 펀드가 투자대상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된다. 따라서 증권펀드라도 시황에 따라 부동산이나 선박 등에 대한 투자가 가능하며, 부동산펀드도 증권이나 파생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투자자보호도 선진국 수준으로
자통법이 시행되면 투자자에 대한 보호장치가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되고 시장의 투명성도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금융투자회사가 원금 손실 위험이 있는 금융투자상품의 투자를 권유할 경우 ‘설명의무’를 지게 된다. 금융투자회사는 상품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나 분석능력이 없는 일반투자자에게 투자를 권유할 때는, 팔고자 하는 상품의 내용과 위험을 충분히 설명한 뒤 이를 투자자가 이해했음을 확인하는 서명을 받아야 한다.
투자를 권유하기 이전에 투자자의 투자목적, 재산상태, 투자경험 등을 인터뷰를 통해 파악하고 서면으로 확인 받도록 하는 ‘고객 알기’(Know-Your-Customer-Rule) 의무도 신설된다. 금융회사가 고객이 투자에 따른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 되는지를 고려해 적합한 투자상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자가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계속 금융투자상품을 권유하는 ‘의사에 반하는 재권유’ 금지도 모든 금융투자상품에 대해 적용된다.
금융투자회사 임ㆍ직원에 대한 주식 직접투자 제한이 사라지는 것도 큰 변화다. 기존에는 증권사 직원들에 대해 증권, 선물의 직접투자를 금지하는 대신, 급여의 일정 한도 내에서 증권저축은 허용해 왔다. 하지만 증권저축은 통상적인 위탁매매 계좌처럼 운용이 가능해, 사실상의 직접투자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자기 명의로 1인 1계좌를 허용하는 대신 매매내역을 정기적으로 소속회사에 통지하도록 하는 등 선진국 수준의 내부통제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강수확률 투자·영화펀드' 다양한 상품 쏟아진다
투자상품의 다양화는 금융권의 빅뱅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자통법의 원조격인 영국과 호주처럼 참신한 상품이 적극적인 투자를 촉발하면 한국 금융시장도 급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우선 파생상품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기존에는 주가연계증권(ELS)처럼 금융상품이나 실물자산과 연계된 상품만이 허용됐지만, 자통법이 시행되면 ‘계량화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파생상품의 기초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골프장 사장이나 야외공연을 준비하는 기획사라면 강수확률을 대상으로 한 파생상품을 사들여 비가 올 경우 입게 될 사업 손실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허리케인 발생가능성을 상품화해 미국에서 인기를 끈 ‘캣본드’처럼 재난과 관련된 상품도 등장할 수 있으며, 유럽에서는 이미 시장이 형성돼있는 이산화탄소 배출권의 거래도 이루어질 전망이다.
간접투자상품도 훨씬 다양해질 전망이다. 현재는 펀드의 투자대상이 증권, 선물, 부동산, 실물자산, 어음, 광업권, 어업권, 보험금 지급 청구권 등으로 나열돼 있지만 앞으로는 재산 가치가 있는 모든 자산으로 확대된다. 가령 음원(音源)이나 영화 등과 관련한 지적재산권을 대상으로 한 펀드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금융자산과 실물자산 등 투자대상에 구애를 받지 않는 ‘만능 펀드’도 나온다. 자통법은 자산별 투자비중 제한을 없애, 언제나 어떤 자산에나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혼합자산펀드의 설립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신종 금융상품의 종류가 대폭 늘어남에 따라, 이미 시장에서 충분한 노하우를 쌓아온 외국계 증권사와 국내 증권사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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