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에게 이직(移職)은 더 이상 은밀하거나 낯설지 않다. 기회가 생기고 능력만 받쳐준다면 미련없이 회사를 옮길 수 있다는 인식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보편화 됐다. 평생직장이라는 용어가 용도폐기 된 지 오래인 지금, "이직은 곧 능력"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경향은 20,30대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더 강하다. 이직은 인력의 효율적인 재배치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기업들이 우수 인력을 독식해 고용의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편집자주
전북 전주에 사는 신영철(34ㆍ가명)씨는 지금 세 번째 직장에 다닌다. 경제학을 전공한 신씨는 2001년 5월 유명 편의점 업체에서 점포 개설 일을 담당하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03년 4월 당시 신생 화장품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점포 개설에 관한 노하우를 쌓은 덕분이다. 연봉을 20% 정도 끌어올리는 조건으로 신씨는 둥지를 옮겼다. 그는 올해 1월부터는 식품유통을 하는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일한다. 이미 기반을 다진 화장품 회사보다는 안정성이 떨어졌지만 고민 끝에 명함을 다시 바꿨다.
대우만 좋다면 언제라도
직장을 너무 자주 옮긴 건 아닐까. 신씨는 “돈도 돈이지만 내 능력을 필요로 하고 능력만큼 대우해 주는 회사로 옮기는 건 이제 자연스런 트렌드”라고 말했다.
국내 한 이동통신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진규(35ㆍ가명)씨는 올 3월 경쟁 회사로 옮겼다. 6년 만의 첫 이직이다. “전 직장 동기들이 하나 둘 다른 회사로 떠나는 걸 보면서 나 혼자 낙오자가 돼 가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는 김씨는 “직장을 두 세 번 옮긴 친구들이 나보다 연봉이 1,000만원에서 2,000만원이나 많다며 자랑할 때는 속도 많이 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매너리즘에 빠져 지금쯤은 현실에 안주해 있을 지도 모른다”며 “회사 분위기 등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워 이직을 잘했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직이 늘고 있는 사실은 최근 몇 년 새 폭증한 헤드헌팅 업체 수에서 잘 나타난다. 2000년 불과 50곳 남짓했던 헤드헌팅 업체는 현재 500곳이 넘는다. 업체 수만 따져보면 5년 동안 이직 시장이 10배나 성장한 셈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서미영 상무는 “우리 사이트에 이직을 위해 등록한 직장인은 2003년 3만5,000명에서 현재 15만2,000명으로 3년 사이 4배가 넘게 급증했다”고 밝혔다.
비전 없는 회사는 떠난다
왜 떠나려는 걸까 인크루트는 최근 자사 사이트에 이직을 위해 이력서를 등록한 정규직 직장인 1,72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직장인 이직 현황’을 내놓았다. 이직 이유는 ‘회사의 비전과 자신의 경력 개발 가능성이 없어서’(41.4%)와 ‘연봉에 대한 불만’(35.5%)이 1,2위를 차지했다.. 과거 직장인들은 “이 회사를 키워 나도 함께 커 나가겠다”는 조직 중심적인 생각이 강했다면, 이제는 “큰 회사에 가야 나도 큰다”는 개인주의적 인식이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입사 연차가 적을수록 이직에 강한 의지를 갖는 것도 이 때문으로 분석된다.
3년 전 대기업 계열의 유통업체 인사 팀에 들어간 뒤 8월 이직한 강재우(33ㆍ가명)씨는 “연봉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고 나 자신의 발전 가능성도 안 보여 고민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유명 건설회사에서 회계 일을 맡고 있는 그는 “연봉이나 업무 등에 모두 만족한다”며 웃었다.
이직 이유에 대해 인간관계 갈등(9.6%)과 높은 업무강도(8.1%)라는 대답도 많이 나왔다. 특히 대기업 직장인은 인간관계 갈등(12.4%), 높은 업무강도(12.1%)에 대한 불만이 평균을 웃돌았다.
외국계 컨설팅 업체에서 2년째 일하고 있는 심연호(29ㆍ가명)씨는 공사로 자리를 옮길 계획이다. 신규 채용시험을 보든지 경력직 모집에 지원할 생각인 그는 “연봉은 3,100만원 정도로 괜찮고, 회사의 직원 복리 후생도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매일 밤 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회사 나가야 하는 게 이젠 지겹다”며 “연봉은 좀 적어도 내 시간을 갖고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직업능력개발원의 김수원 박사는 “직장인들이 공사 이직을 선호하는 것은 민간 기업에 비해 업무 부담이 적고 구조조정 등 고용불안에서 벗어나 정년을 다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이런 경향은 기성 세대에 비해 풍족하게 자라 의지력이 약해진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떠날 사람은 잡지 않는다
회사와 동료도 이제 떠나려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잡지 않는다. 오히려 이직하는 동료를 부러워한다. 올 봄 취업포털 커리어넷의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10명 중 7명은 동료나 상사의 이직에 대해 “부럽다”고 답했다. 직장 5년차 이선형(30ㆍ여ㆍ가명)씨는 “회사 동기들 중 절반 정도가 다른 회사로 갔다”며 “처음엔 함께 일해 보자며 가지 말라고 설득도 했지만, 지금은 이직할 생각도 않고 한 곳에 머물어 있는 내가 무능력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고 말했다.
한국고용정보원 윤지영 연구원은 “과거에는 오랫동안 한 직장에 다니면서 승진하고 월급 많이 받는 게 성공한 직장인의 표본이었다”며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조건이 더 나은 회사로 옮기는 것을 능력 있는 직장인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이직 성공하려면…
네 차례의 이직으로 지명도가 좋은 중견기업에서 연봉과 직급 모두 만족하고 있던 남상훈(42ㆍ가명)씨는 최근 다섯 번째 이직을 한 뒤 낭패를 봤다. 알고 지내던 사람의 추천으로 2년 만에 회사를 옮긴 남씨는 사장과의 불화로 3개월 만에 퇴사해 지금은 두 달째 실업자 신세다. 남씨는 “더 많은 연봉만 쫓다가 이 꼴이 됐다”며 “옮기려는 회사에 대해 더 알아보고 갔어야 했는데 무조건 아는 사람 말만 듣고 결정한 게 실수였다”고 말했다.
모든 이직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이직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준비와 신중한 결정이다. 무작정 높은 연봉만 따지거나 이직이 결정됐다고 경솔하게 행동하면 나중에 화로 되돌아오기 십상이다. 또 업무 전문성을 살리지 못한 채 이직만 자주하다 보면 경력개발에 소홀해질 수 있고 연봉 올리기도 힘들게 된다.
인크루트의 이광석 대표는 “종신 고용이 무너지면서 직장인들 사이에 이직문화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며 “효율적인 경력개발을 위해서는 충동적으로 사표를 내기보다는 공백기 없이 직무 전문성을 연결할 수 있도록 준비 기간을 두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이직 보편화 의미는
이직의 보편화는 고용 유연성(채용과 해고가 자유로움)이 확대되고 있는 현 노동시장의 흐름을 반영한다. 역량 있는 인재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기업으로 옮겨 일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바람직하다. 기업은 능력 있는 사람을 곧바로 현업에 써 먹을 수 있고, 이직자 개인은 자신의 몸값을 높여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어 좋다.
우려의 시선도 있다. 이직은 많은 비용을 들여 숙련공으로 키워놓은 핵심 인재를 잃어버린 기업의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다. 다 키워놓고 일 시킬 만 하니 인재가 떠나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또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회사를 떠날 수 있다”는 직원에게 조직에 대한 충성과 동료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한정된 우수 인재를 특정 기업이 독점하면 나머지 업체들은 인재난을 겪는 고용 양극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좋은 기업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이며 공정한 경쟁을 통해 인재를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재 편중 현상은 당연한 결과”라는 의견도 새겨들을 만 하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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