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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논술 훈련하는 아이들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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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논술 훈련하는 아이들을 보며

입력
2006.12.1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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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이란 애당초 글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꾸며 대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법정을 떠올려 보면 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변호사를 통해 배심원을 설득해야 했다. 논리적 변론만으로 이기기가 힘들다고 판단할 때마다 점점 교묘한 장치가 필요했고, 그것은 가끔 궤변으로 이어졌다.

길고 현란한 언변은, 종이가 보급되고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주역의 자리를 글쓰기에 넘겨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남호가 <문자제국쇠망약사> 에서 그렸듯이, 전자 시대를 맞아 생각을 종이 위의 문자로 구체화하는 시대가 위기에 처했다.

● "50년 글 쓴 나도 논술 자신 없어"

하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살아 있다. 특히 위력을 발하는 영역이 있어 더욱 그러하다. 바로 대입 논술의 시장이다. 수능 점수 발표를 며칠 앞두고, 이제 수십만의 대입 수험생들이 일제히 맞춤형 글쓰기 훈련에 돌입해 있다. 이 땅에 논리와 문자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훈련소는 논술 학원이다.

온갖 유형의 글들이 읽혀지고, 유사한 문장이 반복해 씌어진다. 그 사이에 대학은 은근히 논술 학원을 비난한다. 수험생들이 작성하는 수백 수천의 논술 답안이 비슷하다고 꼬집는다. 그래서 출제에 감금된 교수들은 더 어려운 문제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그 고뇌를 바깥의 지식인들이 비웃는다. "지금의 대입 논술 시험 제도라면, 50년 이상 글을 써온 나도 합격할 자신이 없다."

대학도 나름대로 욕심이 있다. 적당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한 암기 지식의 상대적 측정 결과로 신입생을 뽑아 등급화한 우리 대학도, 세월의 변화에 따라 판에 박힌 학생을 더 원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일류 대학이라도 일정한 수준의 학생들 중에서 보다 개성적이고 창의성 있는 사람을 고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논술 시험이다.

사실 글쓰기의 구체적 현실을 눈여겨 보면 논술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가 많다. 대학생들이 제출하는 리포트란 것이 대표적이다. 그 문장이나 내용을 확인하다 보면, 입학 때 성적의 진정성을 의심할 때가 많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글도 난감하게 읽힐 때가 많다. 간혹 법원에 보낸 교수가 작성한 전문의견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사태는 종종 벌어진다. 그 자료들을 근거로 쓰는 엘리트 법관의 판결문이란 서식의 문장론도 항상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지적 활동의 기초에 해당하는 것들이 읽기, 생각하기 그리고 쓰기다. 읽은 것들을 이해한 뒤 종합하여 사고하고, 그 결과를 새로이 문장으로 구성해 표현하지 못한다면 전문 영역에 발 디딜 수 없다.

작년 한국을 방문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말만 들어도 그렇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물리학자 칼 와이먼은 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을 개발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학은 문학이나 예술에서 출발한다고 한 사람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스티븐 추다. 아무리 문장력이 없는 사람도 책 열 권만 읽으면 저절로 글 한 편을 쓸 수 있다. 백 권을 읽으면 책 한 권을 만들게 된다.

● 판박이 작문보다 사회환경이 문제

이상적인 논술 대비란 말로는 훤하다. 평소에 책을 열심히 읽고, 생각한 것을 말하고, 틈틈이 써 보면 된다. 그러면 추운 겨울에 학원을 들락거리지 않아도 훌륭한 개성적 작문을 해 낼 수 있다.

하지만 학원에서 훈련받는 일률적 준비도 비난할 일은 못 된다. 그나마 평균 수준에서 남들이 다 하는 정도의 글을 쓰는 것도 능력이다.

다른 지식은 천편일률로 강요하면서 글쓰기에서만 개성을 요구하는 기성 세대와 제도의 염치는 무엇인가. 문제는 판박이 같은 아이들의 작문이 아니다. 경쟁에서 뒤지거나 탈락한 사람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환경과 구조가 큰일일 뿐이다.

차병직 변호사ㆍ참여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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