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눈 밝으세요?” “아니, 별로.” “그러면 이 정도 큰 게 좋겠네요. 이건 너무 작아서 조절하기가 불편해요. 그리고 소리 듣는 구멍이 2개라 할아버지 청력에 더 잘 맞습니다.”
“학생은 청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계속 성장도 할 거니까 보청기를 바꿔줘야 합니다. 하지만 조금 비싸더라도 밖에서 전혀 안 보이는 제일 작은 걸로 하는 게 좋겠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면 심리적인 부담도 고려해야죠.”
서울 을지병원의 보청기 클리닉에서 보청기를 선택하는 의사와 환자의 대화다. 이 곳이 의료기기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놀랍다. 많은 이비인후과 의사들이 “보청기 구입시 전문의와 상담하라”고 말하지만, 막상 의사가 보청기를 고르고 주문하는 병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보청기 클리닉 심현준 교수는 “보청기는 안경과 달리 극도로 섬세한 기기여서 환자의 청력 특성에 따라 보청기를 맞추고, 듣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이비인후과 의사가 보청기 착용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수백만원대의 보청기를 아무렇게나 사서 쓰다가 장롱 속에 처박아 두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79세의 이진순(가명·서울 중랑구 신내동) 할머니는 3년 전 복지관에서 무료 지원해주는 보청기를 받았지만 한두번 쓰고 말았다. 이 할머니는 “복지관 교육프로그램이나 성당에서의 신부님 말소리를 잘 듣게 된 것은 좋았지만 밖에서 오가는 발소리 등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처럼 보청기를 두고도 쓰지 않게 되는 이유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환자들은 “크게 들리기는 하는데 웅웅거려서 너무 시끄럽다” “귀가 먹먹하다” “보청기에서 삑삑 소리가 난다”고 호소한다. 보청기가 처음에 환자에게 잘 안 맞았거나, 제작 후 적응과정을 거치지 않은 탓이다. 보청기는 안경과 달리 두어달 정도 꾸준히 듣는 연습을 하고 자신에게 꼭 맞게 조절해 가면서 적응해야 한다. 시장에서 물건 사듯 의료기기상에서 보청기를 ‘사는’ 것으로 끝나서 안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환자들은 개인마다 고음이 더 안 들리거나 저음이 안 들리는 등 음역(주파수)에 따른 청력의 차이를 보인다. 이것이 들쑥날쑥 하면 보청기가 듣는 채널을 잘라 각 채널마다 들리는 정도를 다르게 조절해야 한다. 귀 모양에 꼭 들어맞지 않아도 문제가 생긴다. 소리가 새면, 노래방에서 마이크가 삑삑거리는 것처럼 보청기가 삑삑거릴 수 있다. 사회적 조건과 생활환경도 중요하다. 심 교수는 “집에서 TV소리 잘 들으려는 노인이라면 관리가 편하고 기능이 많은 귀걸이형이 좋지만, 40대 비즈니스맨이라면 귀 속에 쏙 들어가는 고막형이 좋다”고 권한다. 성장하는 아이들은 2,3년마다 크기를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튜브만 바꾸면 되는 귀걸이형이 좋지만, 청소년기라면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지 않도록 고막형으로 고르는 게 좋다.
보청기를 맞춘 후엔 2개월간 병원을 다니면서 조율을 받아야 한다. 처음엔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면서 보청기가 아주 불편하지만 4,5시간씩 착용하면서 적응을 해야 한다. 또 디지털 보청기의 경우엔 착용 후 청력검사를 반복하면서 환자에게 잘 맞도록 계속 조절할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은 안 들리는 것을 그대로 놔두면 전반적인 언어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보청기 착용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중학생 시절 남들 시선 때문에 끼던 보청기를 빼고 몇 년을 지내다 최근 병원을 다시 찾은 김민혜(가명·25·서울 노원구 상계동)씨는 “보청기를 빼고 난 후 한쪽 귀가 완전히 안 들릴 정도로 급격히 나빠졌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수년간 대화가 줄어들면서 발음도 불분명해졌다.
● 보청기 어떤 경우 끼나
소음·약물에 의해 청력 손상된 경우 유용
보청기는 감각신경성 난청 즉 달팽이관의 청신경 세포나 뇌로 소리를 전달하는 신경이 손상된 경우 필요하다. 통상 나이가 들어 잘 안 들리거나, 시끄러운 소음이나 독한 약물에 의해 청력이 손상된 경우다. 중이염으로 안 들리는 경우엔 중이염 수술이 필요하다. 또 정도가 심하면 인공와우 수술이 최후의 방법이다.
기계음을 듣고 청력을 검사하는 순음 청력검사에서 30~90데시빌정도의 청력을 보인 경우라면 보청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상(20데시빌) 청력에서 약간만 떨어지는 정도거나, 거의 안 들리는 경우(90데시빌 이상)라면 보청기가 별 소용이 없다. 또 말소리를 듣고 따라 하는 어음명료도 검사에서 성공률이 50% 이하일 때도 이득이 없다. 이 경우엔 청각 신경보다 대뇌에서의 언어중추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양쪽 귀의 청력 차이가 40데시빌을 넘을 경우 보청기를 껴도 늘 들리는 귀만 사용하게 되므로 굳이 쓸 필요가 없다.
보청기는 귀 속에 완전히 들어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고막형, 귀 입구에서 보청기가 살짝 보이는 귀속형, 귀에 걸어 쓰는 귀걸이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으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며 성능이 단순한 경향이 있다. 디지털 보청기의 가격은 200만~500만원대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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