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연언어에 대한 앎은 좁은 의미의 문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서는 오롯할 수 없다. 예컨대 “명숙아, 이리 좀 와 봐!”라는 한국어 문장은 문법적으로 완전하다. 그러나 이 말을 국무조정실장이 국무총리에게 건넸다면, 매우 부적절한 언어를 썼다고 비난 받을 것이다. 국무조정실장은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으려면, 썩 공손한 어조로, “총리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쪽으로 잠깐 오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
이렇게 똑같은 내용의 말도 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한 언어에 대한 지식은 문법 지식만이 아니라 화용(話用) 지식(더 넓게는 사회언어학 지식)까지 포함한다. 언어에 대한 지식의 장(場)에서 화용 지식은 문법 지식에 견줘 주변적이랄 수 있지만, 실제의 언어 생활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문법 규칙을 어겼다고 해서 사표를 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화용 규칙을 너무 떳떳이 어기면, 앞서 예로 든 가상의 국무조정실장처럼, 일자리를 잃기 십상이다. 실상 말에 얽힌 갈등은 대체로 한쪽 또는 양쪽 화자가 이 화용 규칙을 어겨서 생기게 마련이다. 말이 주먹질로 이어지는 것은, 흔히, 그 말의 시비(是非) 탓이 아니라 적부(適否) 탓이다.
경어체계에 잘 적응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화용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경어체계가 매우 섬세하고 까탈스러운 한국어는 여느 자연언어보다도 화용 지식을 한결 더 요구하는 언어다. 한국어 화자는 상대방에게 말을 걸기 전에 우선 자신과 상대의 위계를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술어의 어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존칭조사를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상대방을 뭐라고 부를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위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핵심적인 것은 나이와 사회적 신분이다. 이것은 경어체계가 매우 단순한 언어에서도 대체로 통용되는 기준이다. 나이가 적거나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은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상례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이가 한 나라의 국무총리까지 하고 있다면, 누구나 그를 ‘총리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나 사회적 신분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친분이나 친족 관계는 이런 공식적 기준을 흩뜨리며 경어법 규칙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예컨대 여고 시절부터 총리와 가깝게 지냈던 동창이라면 사석에서 그를 “명숙아!”라고 부를 수 있다. 총리의 이질(姨姪)은, 사석에서, 그를 “이모!”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총리 쪽에서도, 15년 연하의 시동생이 설령 날건달로 살고 있다 해도, 그에게 말을 낮출 수 없다. 그 시동생이 미혼이라면 “도련님!”으로, 기혼이라면 “서방님!”으로 불러야 한다. 서술어도 그 호칭에 조응하는 경어체 어미로 마무리해야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럽어들은 2인칭 대명사와 거기 대응하는 동사 형태를 통해 대체로 두 등급의 경어체계를 부리고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어에서는 주격 2인칭 대명사 ‘튀’(tu)와 ‘부’(vous: 단수 존칭대명사로도 쓰이지만 본디 복수 대명사다. 그래서 거기 따르는 동사들도 주어가 복수일 때처럼 변화한다)가, 스페인어에서는 주격 2인칭 대명사 ‘투’(tu)와 ‘우스텟’(usted: 존칭대명사처럼 쓰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은혜’라는 뜻의 명사구 vuestra merced의 축약형이다. 그래서 거기 따르는 동사들도 주어가 3인칭일 때처럼 변화한다)이 각각 낮춤말과 높임말을 대표한다. 특별히 정중함이 요구되는 맥락을 빼놓고는, 이 언어들에서 경어체계는 낮춤말 쪽으로 이끌리며 중화하고 있는 추세다. ‘부’와 ‘우스텟’을 쓰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너나들이(‘tu’로 말하기: 프랑스어로는 ‘tutoyer’, 스페인어로는 ‘tutear’)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어체계의 약화는 한국어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그러나 그 본바탕이 워낙 복잡하고 섬세했던 터라, 지금도 경어체계는 이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악몽이다. 우선 어휘론 수준에서, 한국어는 일반적으로 두(드물게는 세) 등급의 단순한 경어체계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자다’와 ‘주무시다’, ‘먹다’와 ‘들다’(‘드시다’)와 ‘자시다’(‘잡수다’, ‘잡수시다’), ‘있다’와 ‘계시다’, ‘주다’와 ‘드리다’, ‘묻다’와 ‘여쭈다’(‘여쭙다’) 같은 동사들, ‘이/가’와 ‘께서’, ‘에게’와 ‘께’ 같은 조사들, ‘밥’과 ‘진지’, ‘말’과 ‘말씀’ 같은 명사들이 이 두 등급 경어체계의 낮춤말과 높임말들이다.
그러나 사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잡수시다’나 ‘주무시다’나 ‘계시다’는 그 행위의 주체를 높이는 것이지만, ‘여쭙다’나 ‘드리다’는 그 행위의 객체를 높이는 것이다. 즉 ‘여쭙다’와 ‘드리다’?묻거나 주는 행위의 주체를 낮추는 것이다. 한국어의 경어체계에는 존경법과 겸손법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말씀’ 같은 말은, 더 나아가, 존경법과 겸손법을 겸한다. 다시 말해 ‘말씀’은 맥락에 따라 그 주체를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 “총리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에서 ‘말씀’은 총리를 높이는 것이지만,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에서 ‘말씀’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이런 어휘론 수준의 두 등급 경어법 가운데 일부 한국어학자들이 ‘압존법’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압존법이란 아주 높은 청자 앞에서 그보다 덜 높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그가 화자의 손윗사람일지라도 낮추어 표현하는 법을 말한다. 압존법에 따르면,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병세를 고할 때 “할아버님, 애비가 많이 아픕니다”라고 말해야 옳다. 언급의 대상이 된 사람(아버지)이 청자(할아버지)보다 손아래이므로, 비록 화자가 그 대상보다 손아래일지라도 그를 높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그 같은 처지를 어머니에게 고할 때는 “어머님, 아버님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압존법은 가족을 포함한 친족 관계에 주로 적용되지만, 청자가 (이를테면 텔레비전 시청자처럼) 불특정 다수일 때도 적용된다. 예컨대 쇼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는 연예인이 자신의 연예계 스승이나 선배에 대해 언급하며 ‘아무개 선생님’이라거나 ‘아무개 선배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듣는 사람 가운데는 그 선배나 스승보다 훨씬 손윗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럴 때는, 언급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잠시 접고, ‘아무개씨’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도 더러 압존법을 무시하고 ‘선배님’ ‘스승님’을 고집하는 방송인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언어사용에 비난이 이는 걸 보면, 아직까지 평균적 한국어 화자의 언어의식 속에선 압존법이 규범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친족 사이의 압존법은 현대한국어에서 약화하는 추세다.
한국어 경어체계가 그 복잡성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형태론 수준, 구체적으로 용언의 종결형에서다. 예컨대 동사 ‘하다’는 명령형에서만도 화자와 청자의 위계에 따라 ‘해, 해라, 하라, 하게, 하시게, 해요, 하세요(하시오), 하십시오, 하소서, 하옵소서, 하시옵소서’ 따위로 변한다. (물론 하소서-체의 일부 형태는 문어나 사극 대사에서나 사용될 뿐, 구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구어에서 사용됐다면, 그것은 ‘비틀기’의 맥락에서 사용된 것이다.) 서술형과 의문형에서는 화자와 청자만이 아니라 언급되는 대상까지 끼여들어 위계질서와 경어체계를 한결 더 복잡하게 만든다.
용언 어미에 따라서 한국어 경어체계를 세운다면 그 안에는 몇 개의 등급이 있을까? 전문적 관찰자 곧 한국어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리지만, 세대에 따라서도 경어체계 내부에 지니고 있는 등급의 수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농촌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여섯 이상의 등급을 내면화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경어체계를 막 익히기 시작한 어린아이는 상대가 어른이냐 아니냐에 따라 두 등급만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청장년층은 보통 서너 개의 등급을 내면화하고 있는 듯하다. 이 때 농촌 노인들이 지닌, 가장 복잡하고 발달한 경어체계를 한국어의 표준적 경어체계라고 볼 수는 없다. 청장년층이 노년층이 된다 해서, 새 규칙을 익히며 제 한국어의 경어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리라고 볼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이 지닌 서너 개의 등급을 생애 마지막까지 그대로 가져갈 확률이 훨씬 높다. 그것은 한국어 경어체계가 점차 간소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어 경어체계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예로, 2인칭 대명사가 손아랫사람이나 허물없는 친구를 가리키는 때를 빼고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적할 만하다. 문법 교과서는 2인칭 대명사를 여럿 늘어놓고 있지만, 한국어 2인칭 대명사는, 적어도 구어 수준에서는, 평칭의 ‘너’(너희/너희들) 하나뿐이다. 약간의 높임을 지닌 대명사로 2인칭 ‘당신’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은 중년 이상의 부부 사이에서나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부부가 아닌 경우에도 ‘당신’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직장에서 또래의 동료나 후배를 살갑지 않게 부를 때나, 싸움판에서 막말이 나오기 직전에 상대방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쓴다. 아무튼 이 말은 부부 사이에서가 아니라면 일정한 갈등이나 냉담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어서, 여느 맥락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너’라고 지칭할 수 없는 상대를, 그러니까 존칭을 써야 할 상대를 2인칭으로 삼아 말을 꺼내려면 한국어 화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때 그는 그 자리를 비워놓는다. 예컨대 “이것 드셔보셨습니까?”처럼. 꼭 2인칭 대명사가 올 자리가 아니어도 한국어에서는 주어의 생략이 본디 자연스럽다. 2인칭 주어를 생략하기 싫으면, 이 화자는 연령적 친족적 직업적 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예컨대 선배님, 할아버님, 장관님, 박사님)를 대명사처럼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장관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어쩝니까?”처럼.
경어체계는 언어예절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이다. 예절은 한 공동체의 파열을 막는 거푸집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자질구레할 땐, 또 너무 경직되게 운용될 땐 공동체 구성원의 생기와 친밀감을 옥죄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 경어체계가 형식화하고 있는 예절은 거푸집보다는 사슬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 예절이, 특히 한국어 경어체계에서 보듯,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이고, 상호적이라기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어체계는 아주 깊은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한국어 경어체계의 흔들림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통일 수 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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