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약속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해거름이면 매일 모였고, 그렇게 모인 인사들은 문학적 경향과 지향에 관계없이 문단 전체를 아우를 만큼 방대했다. 자리가 크다 보니 술병과 함께 나자빠지며 고성방가를 일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왔는지도 모르게 구석 자리를 차지하다 고요히 목을 축이고 돌아서는 이도 있었다. 사흘 넘게 술집에 주둔하며 용맹정진했던 전설적 술꾼들의 일화도 전해진다. 그런데, 사라졌다. 그 많던 문단의 술자리들이!
시인인 강형철(51)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한국문단이 술을 마시지 않게 된 이유를 분석했다. <대산문화> 겨울호 기획특집에 실린 동명의 기고문에서다. 강 교수는 “내 기억이 맞다면 대강 1990년대가 진행되면서 술을 대규모로, 또 지속적으로 마시는 일이 없어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술을 빌미로 시대와 문학을 얘기하고 서로의 ‘몸부빔’ 속에 그간의 불만을 날려버리던, 한국문단의 익숙한 풍경이 사라진 것이다. 대산문화>
그는 문단에서 술을 몰아낸 ‘3대 숙적’으로 컴퓨터와 자동차, 휴대폰을 꼽았다. 그 중 가장 결정적 원인은 컴퓨터. “예전에는 원고 한 편을 써도 원고지를 수십 장 버리고 겨우 완성해서 출판사로 달려가 원고를 건네주고, 원고료도 봉투를 통해 받아서 그 돈으로 술을 마시는 즐거움이 있었”다. “거지가 늘 거지가 아니듯 빈털터리가 늘 빈털터리는 아닌 것. 가끔 호기있게 술을 마시고 돈을 착 낼 때의 즐거움이라니. 그러나 이제는 카드 한 장이면 다 되고 돈도 컴퓨터에서 왔다갔다 한다. …이른바 눈을 마주하면서 나누던 정(情)의 시대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작가들 술자리에 운전면허 소지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분위기가 깨졌다는 이유로 자동차도 지탄의 대상이다. 술이라는 게 “모여 앉은 사람들이 비슷한 도수(度數)로 눈이 풀려야 재미가 있는 법인데 한두 명이 도수 안 올라 눈을 떼꾼하게 뜨고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피차 지옥”이다. 그렇다고 “차 가져왔다는데 술을 권하면 죽으라는 말과 같은 말”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 술자리가 뜸해지고 작가들끼리도 소원해졌단다.
휴대폰은 누군가와 연락하기 위해 반드시 그 술집에 가야 했던 과거의 필수 연락망을 파괴시킨 ‘원흉’. 언제부터인가 작가들이 하나둘씩 휴대폰을 갖게 됐고, 누군가 안색을 바꾸고 전화를 받기 시작하면서 술자리 분위기가 확 깨지고 말았다. 강 교수는 “누구도 즉각 호출되어 어디론가 가버릴 수 있다면 술자리는 늘 파국으로 흐를 가망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진짜 술꾼이 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의 원인 분석에 하나 덧대면, 파주출판단지 조성으로 상당수의 출판사들이 서울을 떠난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장례식장이나 시상식, 연말연시의 특정 이벤트가 아니면 다같이 만날 술자리가 없다는 푸념이 문단 주당들 사이에서 종종 터져나온다. 그러나 바야흐로 연말연시. 서서히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먹이를 찾아헤맬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그들. “어디 술자리 없나?”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