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대우조선소가 거제도를 미기 살리는 기라예.”
경남 거제시는 지난해 말부터 ‘거제사랑 상품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재래시장과 중소 상인들의 상권 회복을 돕기 위한 것이다. 국내 경기가 워낙 나쁜 탓에 주민들의 외면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56억원 어치나 팔렸다. 조선업 호황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삼성중공업과 대우해양조선 근로자들이 전체 상품권의 92%를 매입한 덕분이다.
경남 거제시 옥포2동 옥포시장에서 17년째 옷 가게를 하고 있는 김성용(46ㆍ시장상인회 회장)씨는 “사상 최대 호황을 맞은 두 조선소가 지금처럼 돈을 풀면 머지않아 거제도는 선진국 문턱에 들어설 것”이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거제도는 요즘 축제 분위기다. 거리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주민들의 얼굴에서도 활기가 느껴진다. 장기간의 경기 불황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육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거제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거제도는 제주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지만, 조선소가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멸치잡이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촌이었다. 그런데 1973년 대우해양조선, 79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천지개벽이 시작됐다.
특히 올해는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해 거제시로 출범한지 11년 만에 인구 20만명을 돌파했고, 삼성과 대우조선이 수주액 합계 200억 달러를 달성한 뜻 깊은 해이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는 이미 8월에 수주 100억 달러를 달성, 사상 최대였던 작년 수주액(77억 달러)을 뛰어넘었다. 올해 수주 목표도 130억 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대우조선도 최근 연간 수주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현재 두 조선소는 지역경제의 80%를 떠안고 있다. 근로자 수는 대우 2만5,752명, 삼성 2만2,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가깝다. 가족을 합치면 15만3,000여명으로 거제 인구의 76.5%나 된다. 두 조선소가 지급하는 연간 급여(협력업체 포함)는 2조1,600억원. 매달 2,000억원 가까운 현금이 풀리는 셈이다. 조선소 구내식당에서 소비하는 식재료비만 연간 300억원에 달한다.
재정 기여도 역시 독보적이다. 지난해 두 조선소가 거제시에 낸 지방세는 319억원으로 전체 지방세의 42.7%, 거제시 총예산(5,003억원)의 6.37%에 달했다. 지역내총생산(GRDP)은 4조3,870억원으로 경남지역 20개 시ㆍ군 가운데 국내 최대 기계공업단지(창원공단)를 끼고 있는 인구 50만명의 창원시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주민 1인 당 소득도 2004년 2만2,000달러에서 지난해 2만5,000달러로 높아져 ‘3만불 시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인구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진주 창원 마산 등 인근 대도시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올들어 매달 450여명씩 불어나 10년 내 3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조선소의 직업훈련소에서 3개월 단위로 수백명의 신규 인력이 배출되는데 힘입은 것이다.
거제시는 ‘지역경제의 효자’인 조선산업을 지켜내기 위해 2004년 7월 지역경제과에 조선산업지원계를 신설, 두 조선소 현안인 사내 협력업체 역외 이전을 위한 신규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조선업 호황으로 지역 사회에 돈이 흘러 넘치면서 관련 서비스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9월 대형 할인마트 1호점으로 출범한 홈플러스 거제점은 개점 당일 10억5,000만원의 기록적인 매출을 올린 데 이어 하루 평균 2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마산 창원 등 인근 대도시 대형 할인점의 매출을 뛰어넘는 것이다. 지난달 10일에는 중소도시에선 이례적으로 지하 2층, 지상 6층(연면적 2만2,000여평) 규모의 오션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이 백화점 한종철(41) 판촉제작팀장은 “국내 유명 브랜드는 물론,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할인매장이 함께 입점해 지역자금의 역외 유출을 막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문을 연지 1개월도 채 안된 지방 백화점이지만 매출액 증가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질소득 정체로 지방 도시의 학원ㆍ음식ㆍ숙박업 등이 된서리를 맞고 있는 반면, 거제도의 서비스업체들은 인구 및 소득 증가로 즐거운 비명이다. 학원 등 교육서비스업은 2004년 552개에서 지난해 563개로 늘었고, 올해 들어서도 44개가 새로 생겼다. 숙박ㆍ음식점업은 2004년 3,329개에서 지난해 3,384개로, 문화ㆍ운동ㆍ오락업도 489개에서 518개로 각각 늘어났다. 옥포 대우해양조선 부근에서 수학전문학원을 운영하는 정모(42)씨는 “학부모 교육열이 대도시에 뒤지지 않기 때문인지 학원 수가 많고 질적인 수준도 매우 높다”고 말했다.
호황의 그림자도 있다. 두 조선소의 퇴직금 중간정산 등으로 풀린 목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돼 부동산경기가 후끈 달아오른 것이다. 도로를 끼고 있는 논ㆍ밭은 평당 30만~50만원대로 2년 전에 비해 두세 배나 올랐다. 부동산 거래실적도 2004년 1만7,720필지에서 지난해 2만209필지로 늘어났다. 거제시의 1~8월 땅값 상승률은 4.14%로 전국 평균(3.58%)을 웃돌아 9월26일 토지투기지역으로 지정됐다.
조선소 인근의 신규 아파트 분양열기도 수도권 신도시를 방불케 한다. 현재 유명 브랜드 아파트를 포함해 17개 업체에서 6,752가구를 시공하고 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에는 평당 분양가가 최고 800만원을 웃도는 등 웬만한 대도시 못지않은 가격인데도 아파트를 구입하려는 주민들로 초만원이다.
거제=이동렬기자 dylee@hk.co.kr
강종일 지역경제협의회 이사장
거제도 재래시장과 중소상인 연합체인 사단법인 ‘거제사랑 지역경제협의회’ 강종일(47) 이사장은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삼성과 대우조선소 가족들을 붙잡기 위해 170여명의 회원들이 상품의 질을 높이고 서비스를 한층 강화하는 등 자구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출범한 이 협의회는 거제지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거제사랑 상품권’ 발행을 시청에 건의, 지난해 말부터 판매에 나섰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강 이사장은 “지역상품권 제도를 먼저 시행한 경남지역 타 시ㆍ군이 판매 부진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며 “발행 10개월 만에 56억원의 판매고를 올린 것은 국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조선소 가족들이 52억원 어치를 구입할 정도로 적극 나서준 덕분에 지역 영세상권이 큰 힘을 얻고 있다”며 두 조선소 근로자들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530개 상품권 가맹점들은 조선소 직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5~7% 상시 할인과 최대 20% 특별 할인행사를 여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협의회는 내년에 거제사랑 상품권 발행액을 100억원대로 늘리고 재래시장에서만 쓸 수 있는 ‘재래시장용 상품권’도 발행할 계획이다. 강 이사장은 “지역 상인들 대부분이 두 조선소가 지역경제의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며 “상품권 활성화는 물론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소비문화를 교육할 수 있는 중고장터를 개설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통해 ‘부자 거제’ 만들기에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이동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