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 너도나도…성장·회춘제로 둔갑…月100만원 넘어효능 검증 안된 채 인터넷서도 유통 "과잉 투여하면 몸의 균형 깨져" 지적
#1. 중학교 1학년 민선영(13)양은 어릴 때부터 작은 키 때문에 놀림을 받아 2년 전 성장호르몬 치료를 시도했다. 당시 서울 용산구의 모 병원 의사는 민양의 성장호르몬 수치가 정상인 보다 지나치게 낮다며 4주에 88만원 하는 외제 성장호르몬 투여를 권했다.
그런데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은지 3개월 뒤부터 갑상선 수치가 너무 올라가 잦은 흥분과 극도로 민감한 증세가 나타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후 주사량을 줄이면서 이런 증세는 없어졌지만, 1년간 성장호르몬을 투여해 자란 키는 1㎝에 불과했다. 민양 아버지는 제약사에 나머지 약을 환불 조치하고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2. 중소 유통업체에 다니는 박모(26)씨는 키나 몸무게는 정상인데 음경이 작아 고민이다. 성격이 여성스러워 남성호르몬 분비가 덜 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한 그는 최근 인터넷 건강기능식품 사이트에서 ‘천연프로호르몬’으로 분류된 남성호르몬 제품을 구입해 복용하고 있다.
친구에게서 호르몬을 투여하면 음경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판매처를 찾아낸 것이다. 박씨는 “9만8,000원을 주고 미국에서 수입됐다는 남성호르몬 보충식품 1병(90정)을 구입해 복용하고 있다”며 “직장 동료들 중에도 성기능을 강화하고 근육량을 키워준다는 선전을 믿고 이런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970, 80년대 중년 남성들 사이에선 ‘대포(Depot) 한대 맞으러 가자’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대포’란 남성호르몬의 일종으로, 주사를 맞으면 일시적으로 성기능을 높여주는 효능이 있었다. 이후 먹는 알약까지 나와 음성적으로 유통됐으나 간암 발생의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라졌다.
그런데 급속한 인구 고령화와 외모지상주의가 한동안 사라졌던 호르몬 요법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고 있다. ‘큰 키’와 ‘탱탱한 피부’, ‘강한 성적 능력’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청춘 주스’ ‘회춘 묘약’ ‘키 플러스’ 등으로 불리는 각종 호르몬제가 주목 받는 이유다.
●질병 치료보다 정력ㆍ회춘제로 남용
호르몬 요법 대중화의 일등공신(?)은 의사들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의료환경에서 일부 호르몬결핍증 환자를 제외하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호르몬 요법은 황금알을 낳는 ‘블루오션’인 셈이다.
낮은 출산율로 경영난에 처한 일부 산부인과는 노화방지ㆍ비만클리닉 등을 표방하고 나섰고, 소아과와 비뇨기과도 성장클리닉이나 갱년기클리닉에 집중하는 추세다. 한의원들도 상당수가 성장ㆍ비만ㆍ노화방지클리닉을 전문으로 내세우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여성호르몬 보충요법은 폐경기 중년 여성에게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같이 투여해 갱년기증상을 완화해주는 치료법이다. 여성호르몬 분비가 현저하게 줄어든 중년 여성에게 주사할 경우 골다공증 예방이나 우울증, 피부트러블 개선 등에 효과가 있다.
또 중ㆍ장년 남성이 남성호르몬을 맞으면 근력이 강화되고 발기력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부에 붙이는 패치형, 먹는 경구형, 바르는 겔 형태의 남성호르몬 제제가 출시돼 있으나 흡수가 잘 안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묻힐 염려가 있어 주사제가 선호된다. 최근엔 한번 주사를 맞으면 3개월간 약효가 지속되는 제품이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문제는 갱년기장애가 두드러진 환자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할 성호르몬 요법이 건강한 중년 남녀의 ‘회춘제’로 둔갑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면서 호르몬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정도라면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보완이 가능한데도, 마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돌려주는 ‘신비의 묘약’으로 과대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 비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엔 성호르몬에 성장호르몬을 같이 투여하는 복합 처방이 유행하면서 치료 비용이 월 100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1년간 장기 치료할 경우 1,200만~1,500만원이 소요된다.
성장호르몬 역시 당초 왜소증 환자 치료용으로 개발됐으나 지금은 오히려 중년 남성들의 근력 강화와 정력제로 더 많이 사용된다.
일부 소아과와 성장클리닉을 표방하는 한의원들은 여자 아이의 생리가 시작되면 성장판이 닫혀 키가 크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생리 시작을 강제로 늦추는 ‘생리 지연’ 치료를 하고 있다. 또 서울 강남의 일부 소아과와 비뇨기과에선 남성호르몬을 투여해 남자 아이의 음경을 키워주는 ‘고추 키우기’ 시술도 성행하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호르몬 기능식품 범람
더욱 심각한 문제는 효능과 부작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각종 호르몬제가 인터넷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들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성장호르몬을 비롯,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 멜라토닌, DHEA, 프레그네롤론, 감마리놀렌산 등 ‘슈퍼호르몬’으로 불리는 각종 호르몬 제품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심지어 국내 상위권 제약사들도 외모지상주의 붐을 타고 검증되지 않은 성장발육 기능식품과 키 성장 운동기구, 성장촉진제 등을 판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장을 도와준다는 건강기능식품을 무분별하게 복용하면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작은 키는 영양학적 문제보다 유전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데, 충분한 영양공급이 이뤄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해 성장을 유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호르몬 치료 역시 엄청난 비용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효과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게 의학계의 중론이다. 호르몬제를 투여하면 노화에 따른 생리적 변화를 부분적으로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으나, 어떤 호르몬도 노화를 예방하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호르몬을 과잉 투여할 경우 자체 호르몬 분비 기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유방암 갑상선암 등 각종 암과 당뇨병, 치매, 중풍, 갑상선 기능 저하, 전립선비대증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위험이 커진다.
서울대의대 이홍규 교수는 “장기적인 투여로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면 피드백 기능에 의해 자체 호르몬 생산ㆍ분비가 줄어들어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며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한 분야에 호르몬 요법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고재학(팀장)·송영웅·김용식·안형영기자 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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