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심지어 돌멩이라도 수출하는 척해야'기업보국(企業報國)'의 명함을 내밀 수 있었던 1970~80년대, 대기업 계열의 종합상사 위세는 대단했다. 박정희 정부가 75년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동력이자 첨병으로 삼기 위해 종합상사 제도를 도입하자 삼성 현대 대우 LG SK 등 재벌 그룹은'버터ㆍ비누에서 미사일까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앞 다퉈 자격을 따냈다.
수출신용장만 내밀면 우수수 쏟아지는 세금ㆍ금리ㆍ대출 특혜는 너무나 달콤했고, 대외거래의 허점을 이용한 갖가지 변칙행태가 가능했던 것도 큰 매력이었다.
▦ 종합상사의 부침 및 공과는 압축과속성장 신화의 명멸 및 재평가와 궤를 같이 한다. 64년 세계 90위권인 1억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71년 10억달러에 이어 77년 100억달러를 넘고, 95년 마침내 세계 10위권인 1,000억달러를 돌파하기까지 종합상사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상사맨'으로 불렸던'Made in Korea의 전도사'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열대사막에서 난로를 팔고 시베리아에서 냉장고를 팔았다는 미확인 전설도 수두룩하다. 종합상사는 그룹 내에서 최고의 대우와 지위를 누렸고, 상사맨들은 일등신랑감 반열의 선두에 섰다.
▦ 우리나라 수출이 5일쯤 3,000억달러를 넘어선다고 한다. 2004년 2,000억달러를 돌파한 지 2년 만이고, 2010년엔'수출 5,000억달러 시대'를 맞을 전망이다. 하지만 종합상사의 위상과 자부심은 예전 같지 않다.
삼성물산 현대상사 SK네트웍스 LG상사 대우 등이 90년대 중반까지 독점했던 수출 10대기업 명단은 이제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현대중공업 기아차 등이 차지했다. 5대 수출견인차 리스트는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선박 석유제품으로 채워졌다. 이 사이 대우 SK 등의 대규모 분식회계 사건이 터져 종합상사가 비리의 온상처럼 비치기도 했다.
▦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체득한'글로벌 스탠더드'가 종합상사의 쇠락을 재촉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세계시장을 상대로장사하면서도 오너의 총애를 업고 수익보다 물량, 내실보다 거품을 앞세우는 황제식 경영에 의존해왔음이 드러난 까닭이다. 하지만 쓴 약이 몸에 이롭다고 했던가. 종합상사의 최근 변신이 눈부시다.
해외자원개발은 구문이 됐고, 에너지 유통, 브랜드 마케팅, 기업인수합병 등 사업영역도 다채롭다. 특혜와 독점 위에 쌓은 모래성의 추억은 멀리 하고, 특유의 저돌성과 진취성을 살린 종합상사의 새 역할이 기대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