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手記)는 자기의 생활이나 체험을 직접 쓴 글이다. 잡다한 삶의 비늘을 모아 몸피를 채우고 도금을 하는 작업이다. 한 영혼의 존재가 오롯이 스며든 수기는 그를, 나아가 그가 속한 집단을 이해하는 머릿돌이다.
<전ㆍ의경 그들의 삶> 이란 수기집이 31일 나왔다. 집회 및 시위현장의 체험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경찰청이 8월부터 모은 278편 중 정제된 10편을 따로 모았다. 책 속엔 집회현장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전ㆍ의경의 솔직한 속내가 살아 숨쉰다. 전ㆍ의경>
책 첫머리(최우수상)엔 서울 마포방범순찰대 황호진(22ㆍ한양대 생명공학과 휴학) 일경의 글이 자리잡고 있다. 3월 입대한 그는 최근 시위상황이 많아지면서 한 달에 반은 현장에 출동한다. 그가 기록한 장면은 6월 시각장애인의 마포대교 시위 현장이다.
고된 근무환경부터 운을 뗀다. “강바람이 이렇게 추운지 몰랐다. … 발 밑에 출렁이는 어둠의 저 건너편에 어머니의 모습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 아련한 기억 끝에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대한민국 의무경찰이기에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 꾸벅꾸벅 조는 대원도 있다. 허기진 배 또한 괴롭힌다.”
시위대와의 접전은 감정을 극으로 몬다. “피켓으로 우리를 내려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 체력이 다한 대원 몇몇은 부상을 입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시위대 한 명이 시너를 뿌렸다. 화가 치밀었다. 장애인이지만 괘씸하고 미웠다. 당장이라도 다 때려 잡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는 안다. “사실상 우리는 그들의 적이 아니다. 다만 안전을 위해 배치됐을 뿐이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온갖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근무를 했는가.” 스스로 답한다. “아무도 몰라줘도 좋다. 치안과 평화를 위한 우리의 숭고한 임무는 영원히 계속된다.”
황 일경뿐 아니라 책에 글이 실린 전ㆍ의경들은 “대추리 너른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보고”(강민구 일경) “돌고 돌아도 시위대와 경찰은 결국 같은 존재라는 ‘뫼비우스의 띠’의 참뜻을 이해해야 폭력이 사라질 것”(김경일 일경)이라고 말하는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다.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내모는 집회문화가 개선돼야 한다”며 한목소리로 말하지만 정작 그 근본에 대해선 우리 사회 전체의 숙제로 남겨두었다.
수기집엔 전ㆍ의경뿐 아니라 자식을 전장에 보낸 아비의 맘(10편 중 1편)도 실려 있다. 김진혁(57)씨는 “아들(김대성 상경)을 의경에 보낸 게 후회가 된다”며 “방어만 하는 경찰이 폭력경찰이 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평화시위 정착이 절실하다”고 썼다.
비록 책으로 내놓진 않았지만 인터넷상에 실린 농민들의 수기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강광석 전남 강진군농민회 정책실장은 <시름 앓는 농민은 왜 못 보았나> 라는 수기에서 “22일 집회 보도엔 회 싸 들고 배타고 온 신안 사람도, 배추값 폭락에 괴로워하는 해남 사람도, 집회 다녀오다 웅덩이에 빠져 숨진 군산 노인(74)도 없었다”면서 “일부러 한쪽만 보고 전부인양 한다면 사실 왜곡”이라고 적었다. 시름>
그는 “정부가 경찰을 내세우고 경찰은 전경을 앞 선에 세운 현실이 하나의 비극이고 인간본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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