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ㆍ양억관 옮김 / 민음사 발행ㆍ164쪽ㆍ9,000원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의 문투를 빌려 말하면,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한 주석이다. “신주쿠 보도 위에서 주먹만한 돌멩이가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돌멩이가 기어가고 있구나.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돌멩이는 그의 앞에서 걷고 있는 꾀죄죄한 아이가 실에 묶어 질질 끌고 가는 것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아이에게 속은 것이 우울한 게 아니다. 그런 천변지이(天變地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자신의 자포자기가 쓸쓸했던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잎> 중에서) 잎>
택시운전사인 스물 일곱의 ‘나’는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무기력, 다자이 오사무를 슬프게 했던 이 절대 허무의 무중력에서 부유 중이다. 동거중인 여자친구는 “파멸하고 싶은 느낌”에 사로잡혀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일부러 자신을 망치는 사람”(21쪽)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나’가 그렇다. 괜히 야쿠자 패거리에게 담배꽁초를 던져 죽도로 얻어맞는가 하면, 운전을 하다 충동적으로 목숨을 건 끼어들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파멸의 위험 속으로 자신을 내몰며 그 위기 속에서만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한 것보다 더 불안한 것은 없다.
‘나’는 ‘흙 속의 아이’. 20년 전 생매장 당한 경험이 있다. 부모는 ‘나’를 버렸고, ‘나’는 먼 친척 부부의 양아들이 된다. 그곳에서 그는 형언할 수 없는 폭력과 이지메에 시달렸다. 그들의 어린 아이가 울기 때문에 맞고, 오랜만에 차려준 음식을 토했다는 이유로 맞는다. ‘나’는 “발에 차이는 것보다는 손으로 맞는 걸 더 좋아했”는데 그건 “그쪽이 상대와 그나마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움도 분노도 호기심도 없이 그냥 귀찮고 지겹다는 감각으로 그들은 나를 차고 때렸다.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울음을 잊어버렸던 내가 울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55쪽) 그리고 그들은 ‘나’를 땅에 묻었다.
소설은 체념의 충동과 싸우며 홀로 산 속 무덤을 헤쳐 나온 소년이 폭력으로 인해 받은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고 이 땅 위에 발 딛기까지의 몸부림을 차분하고도 애잔하게 펼쳐보인다.
택시 강도에게 목이 졸려 숨이 끊어지려는 찰나 그는 20여년간 그를 가위 누른, 흙더미에 묻히는 환영에 또 한 번 시달린다. 그 때 불현듯 찾아온 생을 향한 의지. “지겨워. 이런 일은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아.”(106쪽) 그의 이념은 “죽으면 되잖아”에서 “살아야 한다”로 훌쩍 자리를 옮긴다. 다자이 오사무가 체념에 몸을 맡겨 끝내 자살을 이루어내고 말았던 것과 달리, 이 소설의 ‘나’는 종내 딛고 일어서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낸다.
무엇보다 <흙 속의 아이> 는 읽고 있노라면 절로 슬퍼지는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처연히 빛난다. 인간 내면의 천착을 통해 타나토스의 지배를 극복하는 과정이 포즈와 가식 없이 절절하다. 훗날 ‘나’를 버린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그는 말한다. “저는 흙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없습니다.”(119쪽) 그가 ‘나는 흙 속의 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수사나 과장이 아니라 축어적 의미에서의 진실처럼 믿겨진다는 게 이 작가가 지닌 놀라운 힘이다.. 흙>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를 신봉한다는 올해 29세의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2002년 데뷔 이래 신초신인상, 노마문예상, 아쿠타가와상 등을 휩쓴 일본의 무서운 신예다. 일본에서는 “폭력에 완전히 노출된 인간의 공포와 분노를 문체의 힘으로 섬세하고 예리하게 표현해낸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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