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 눈발이 날리는 걸 보면서 며칠 전 영국 신문의 칼럼이 생각났다. 어느 저널리스트가 이런 비유를 했다고 한다. 런던 사무실에서 바깥 날씨가 어떠냐고 주변에 묻자 한 동료는 "비가 뿌린다"고 대답한 반면, 다른 이는 "날씨 좋은데"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럴 때 기자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어제 런던에서는 열띤 날씨 논쟁이 있었다"고 쓰거나, 창가로 가서 직접 밖을 살피는 것이다. 과장된 비유지만 유난히 날씨가 변덕스러운 런던에서 흔히 있을 법한 상황에 언론 관행을 빗댄 것이 제법 재미있다.
■ 이 칼럼은 최근 국제적 뉴스가 된 전직 러시아 정보기관원 암살을 보도하는 언론의 자세를 다뤘다. 연방보안국(FSB) 출신으로 6년 전 영국에 망명한 리트비넨코는 한 달 전쯤 알 수 없는 경로로 치명적인 방사능 물질에 노출돼 지난 주 숨졌다.
암살로 추정하는 것은 함께 망명한 러시아 재벌 베레조프스키의 수하(手下)로 오래 일하면서 FSB와 푸틴 대통령의 '악행'을 폭로하는 데 앞장 선 때문이다. 리트비넨코 스스로 사후 공개된 유서에서 '푸틴의 야만 행위'를 저주했고, 보수적 언론은 대뜸 푸틴을 암살배후로 지목했다.
■ 선정적 언론은 의혹을 뒷받침하는 갖가지 추리를 쏟아냈다. 크렘린은 "하찮은 3류 요원 출신을 암살해 센세이션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며 서구의 정치적 음해를 비난하지만 고작 '날씨 논쟁'처럼 다뤄진다.
그러나 이 칼럼은 러시아가 연루된 실마리조차 드러난 게 없는데도 보수신문 더 타임스가 "푸틴이 무고함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고질적인 반 러시아 히스테리에 불과하다고 논평했다.
독일 언론도 베레조프스키가 푸틴 집권 전 혼란기에 부와 권세를 쌓으면서 줄곧 경쟁자들과 마피아 조직이 얽힌 암투를 벌인 점에 비춰 숱한 암살 배후를 떠올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 베레조프스키가 리트비넨코를 스카우트한 것도 그를 노린 폭탄테러를 수사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푸틴 집권 이후 런던으로 쫓겨온 러시아 재벌과 마피아들은 영국의 비호 아래 겉으로 반 푸틴 활동을 하면서 실제는 어두운 이권 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베레조프스키가 리트비넨코를 제거하거나, 제 3국 정보기관이 개입했을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스파이와 암살 얘기는 늘 흥미진진하지만, 영화적 상상력조차 비웃는 음모가 횡행하는 영역이다. 이를 분별하려면 흐린 창 밖을 직접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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