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가 또 말썽이 된 모양이다. 청소년도 성인 인증 절차 없이 바로 볼 수 있는 홈페이지에 대법원에서 음란물로 판결 난 자작 소설 '즐거운 사라'와 남녀의 성기가 드러난 사진 등을 올려 또 경찰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네티즌들도 시끌시끌하다. 음란문제로 꽤 오래 재판에 시달리고 교수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니 본인으로서는 새삼 괴롭기도 하겠다. 그런데 그가 어제 신문 인터뷰에서 "영원히 내 주제는 성이다. 문화 민주화를 위해 불합리를 타파하고 억압된 본능을 바로 세우는 계몽자의 입장에 설 것이다"고 말한 것을 보고 좀 뜨악했다.
■ 한 달 전쯤 인터뷰에서는 "태생이 반골입니다. 이제 와서 변하면 마광수가 아니지요. 1990년대 이후 내 삶이 고통뿐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우리 사회가 '이상한 사회'인 탓이지요.
똘레랑스(관용)가 없는 사회, 여전합니다"라고 한 말까지 떠올라 우습기까지 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좀 냉소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사회의 일반적(또는 지배적) 견해와 다른 의견을 표현했다고 해서 탄압을 받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예로 들어보자. "자고로 아무 거리낌 없는 소인배로서 감히 성인(聖人)에게 반기를 든 자로 이탁오(李卓吾)보다 심한 이가 없다."
■ 청나라 때 대학자 고염무의 말이다. 이탁오(1527~1602)는 명나라 말기 사상가로 당시 체제의 근간인 공맹과 주자를 조롱하여 파란을 일으킨 문제아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의 마르틴 루터"라고 평한 바 있다. 고염무의 비난이나 신 교수의 평가가 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시대의 진정한 문제들을 고뇌하며 평생을 진정한 이단자로 산 대가는 혹독했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이유로 수배되면서 굶어 죽은 두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결국은 옥중에서 자결한다. 남긴 글들은 300년 동안 금서였다.
■ 이런 그가 죽고도 살아남은 이유는 니체의 말로 설명할 수 있겠다. "글로 쓴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저자의 피로 쓴 것만을 애호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마 교수 문제를 빌미로 탁오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제쳐두고 유독 성에 집착하면서 "표현의 자유" 운운하고, 욕설을 빼면 대사의 3분의 2가 날아가는 영화를 만들면서 "리얼리즘"이라고 우기는 '예술가들'이 요새 좀 많은 것 같아서다. 그것도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당연한 가벼움일까?
이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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