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카페리나 자전거, 기차를 타고 좀더 신나게 학교에 가고 싶어요.”(이사벨ㆍ7) “집 옆에 놀이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그레이스ㆍ4) “도시 색깔이 다양했으면 해요.”(에밀리ㆍ4) “아파트식 테마공원을 만들어 주세요.”(피터ㆍ6)
동심(童心)은 꿈을 꾼다. 동심의 꿈은 현실보다는 몽상에 가까울 때가 많다. 기차와 카페리 운행은 엄청난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아파트식 테마공원도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심의 꿈들을 하나하나 실현해나가는 도시가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공항을 벗어나면 도로변을 따라 1~2층의 낮은 주택들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다.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라는 사실을 무색케 할만큼 한가로운 풍경이다. 1시간여를 달려 도심 중심가에 위치한 오클랜드시청에 들어서자 제멋대로 그린 듯한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다. “사생 대회 그림이냐”는 질문에 시청 관계자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도시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놀랍게도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도시계획 초안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는 “어린이들도 도시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도시 발전에 관한 의견을 듣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면서 “실현 가능성 있는 제안부터 제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클랜드시는 2002년부터 ‘함께 키우자(Grow up together)’라는 표어를 모토로 어린이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해오고 있다. 미래세대의 육성은 한 가정이 아닌 지역사회, 더 나아가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는 이를 위해 2002년부터 3년간 여론조사와 관계기관 협의 등 의견수렴 절차를 거쳤다.
특히 시민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04년 6월 2~15세의 취학 전 아동과 초등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도시상’을 알아본 설문조사 결과였다. 시는 아직 글을 모르는 어린이들을 위해 그림으로도 의견을 받았다. 또 표현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연령대에 맞는 질문지와 설명서를 제작하는 등 ‘눈높이’ 정책 입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의 의견은 주로 즐거운 등교 방법, 도서관과 공원 증설, 소음과 오염이 없는 도시, 놀이터 확충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의 제안은 단순히 참고사항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마운티 알버츠 유치원에 다니는 사만다(5)양의 통학수단은 ‘걸어 다니는 스쿨버스’. 일반 스쿨버스처럼 아이들이 집 앞 정거장에서 기다리면 학부모와 시청 직원들이 등굣길을 따라 걸으면서 데려가는 방식이다. 오클랜드시가 학부모단체와 논의 끝에 ‘신나게 등교하고 싶다’는 어린이들의 의견을 현실화한 것이다.
오클랜드시 가족정책팀의 스테파니씨는 “등굣길에 카페리나 기차를 놓을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친구들과 더 친해질 수 있도록 ‘걸어 다니는 스쿨버스’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사만다양은 “걸어가면서 친구들과 재잘 거릴 수 있고 맘대로 장난도 칠 수 있어 좋다”며 “다른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몹시 부러워한다”고 자랑했다.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은 이뿐 만이 아니다. 중앙도서관 앞 공터를 활용해 가족들이 쉴 수 있는 광장을 조성했고, 정기적으로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해변을 청소하는 이벤트도 열고 있다.
시는 소외계층을 아우르는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로버트(45)씨는 비만 때문에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외톨이처럼 지냈으나, 최근 시가 운영하는 수영교실에 참여하면서 친구가 부쩍 늘었다. 그는 이곳에서 각종 운동법을 배우고 종합검진까지 받고 있다. 로버트씨는 “가난과 질병 탓에 항상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이제 삶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시는 경제적 어려움 탓에 부피가 큰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하고 장기간 방치하는 가구를 직접 방문해 무상으로 처리해주는 행사도 갖고 있다. 오클랜드의 골치거리 중 하나였던 거리의 지저분한 낙서도 ‘역발상’으로 해결했다. 낙서를 좋아하는 청소년들을 미리 파악한 다음 이들에게 벽화 그리기를 제안한 것이다.
벽화를 활용한 거리 미화사업은 올 한해 동안 100명이 넘는 청소년이 참여했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가족정책팀 마이크씨는 “낙서를 좋아하는 불우 청소년들에게 가난한 사람들도 지역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가족친화 도시를 만드는데 적극적이다. 시는 올해부터 에너지 관련 기업의 협조를 얻어 호흡기질환 아동이 있는 가구와 저소득층 가구를 대상으로 무료 단열공사를 해주는 ‘따뜻한 가정(Snug home)’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역협력팀장 난디타 마서씨는 “건강한 사회의 대전제는 행복한 가정”이라며 “사회 전 구성원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의견을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클랜드(뉴질랜드)=글ㆍ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사진ㆍ홍인기기자 hongik@hk.co.kr
■ 동네 산파 미드와이프·가정간호사 플렁켓
15개월 된 딸을 둔 재니퍼(35ㆍ여)씨는 10㎏ 남짓인 딸의 몸무게가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입 냄새가 심하게 나자 동네의 가정간호사 단체 ‘플렁켓(Plunket) 센터’를 찾았다. 그가 병원이 아닌 곳을 먼저 찾은 이유는 플렁켓이 지역 어린이들의 건강 상태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딸을 진찰한 간호사는 “걸음마를 시작하는 시기여서 활동량이 늘어나다 보니 몸무게가 늘지 않는 것”이라며 “썩은 치아는 없으니 유산균 요구르트를 많이 먹이라”고 조언했다. 재니퍼씨는 “플렁켓 간호사는 동네 아이들의 사소한 버릇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고 산모들의 건강 관리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키위의 나라 뉴질랜드는 1883년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데다 현 총리가 여성일 정도로 ‘우먼 파워’가 거세다. 성별 임금 격차도 거의 없다. 남성 임금을 100으로 치면 여성은 98에 달한다. 물론 뉴질랜드 여성들에게도 출산과 육아는 녹록지 않은 과제이다. 하지만 다양한 가족친화 정책 덕분에 이 곳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9.6%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뉴질랜드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비영리 시민단체 ‘미드와이프(Mid wifeㆍ산파)’와 ‘플렁켓 간호사(Plunket nurseㆍ가정간호사)’의 역할이 크다. 이들 단체는 국고 지원을 받아 무료로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를 돕고 있다. 여성들은 임신 12주 안에 국립병원이 확보한 리스트를 통해 미드와이프를 구한 뒤 출산 2주 후까지 자신과 태아의 건강상태를 점검 받을 수 있다. 자연분만인 경우엔 전문의 대신 미드와이프가 출산을 책임진다.
출산 2주 후부터 3세 미만까지의 영ㆍ유아 보건서비스는 플렁켓이 맡는다. 현재 뉴질랜드 전역의 600여개 플렁켓 센터에는 간호사 자격증을 갖춘 8,650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 중 8,000여명은 자원봉사자이다. 그만큼 지역 보건에 대한 뉴질랜드인의 관심은 높다.
이 곳의 임무는 영ㆍ유아의 예방접종 및 정기검진 등 보건서비스에 그치지 않는다. 산모가 힘들 때 조언을 해주거나 산모간 정보 공유를 위해 커피 모임, 춤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장난감과 아동용 카시트 대여사업도 하고 있다. 또 오전 7시부터 자정까지 육아와 건강정보를 제공하는 상담전화를 운영한다. 미드와이프와 플렁켓을 활용하면 임신 직후부터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 까지 원스톱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두 자녀를 둔 동포 최경선(45)씨는 “뉴질랜드는 여성이 임신을 한 순간부터 국가와 시민단체가 손을 잡고 육아 부담을 덜어준다”며 “좀 과장하면 애를 거저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뉴질랜드”라고 설명했다.
/안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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