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알트만(Robert Bernard Altmanㆍ1925~2006).
미국의 영화 감독. 그의 최후 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 이 한국에서 지난 10월에 개봉한 지 약 한 달 뒤인 지난 주에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알트만은 미국 미주리주 캔사스시에서 보험 중개인이자 도박사인 아버지와 메이플라워호 이주민의 직계 후손인 어머니 사이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프레리>
그의 가계에는 영국, 아일랜드, 독일계의 피가 섞였다. 보석상이었던 그의 할아버지가 가게 간판을 만들면서 돈을 아끼려고 원래 성인 ‘Altmann’에서 ‘n’자를 하나 떼어냈다고 한다. 알트만은 어려서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고등학교를 거쳐 군사학교를 다녔으며, 18세인 1943년에 입대하여 2차 대전 동안에 B-24 폭격기의 파일럿 생활을 했다.
미주리대학교 컬럼비아 캠퍼스에서 공학 전공을 거친 알트만은 1950년 무렵부터 캔사스시의 산업영화 회사에 취직하여 60편 이상의 단편 산업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최초 영화는 2주만에 찍은 저예산 영화 <비행 소년들> (1955)이었는데 이 영화로 인해 당시 TV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던 히치콕의 눈에 띄어서 TV물을 연출하게 된다. 한국에도 방영된 <보난자> 와 <컴뱃!> 시리즈의 일부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수많은 TV 시리즈물을 1960년대 후반까지 만들었다. 컴뱃!> 보난자> 비행>
<컴뱃!> 제작 중에는 반전 대본을 썼다가 해고되었으며 <버스 정류장>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등장 인물인 살인자가 극중에서 끝내 처벌당하지 않는 바람에 미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는 등의 소동을 겪다가 그 시리즈 자체가 취소되기도 했다. 알트만의 출세작은 한국전쟁이 무대인 미군 야전병원 이야기를 다룬 <매쉬> (1970)라고 할 수 있다. 익살맞으면서도 신랄한 시각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그가 택한 즉흥적 연출 기법은 출연 배우들을 크게 당황시켰다고 한다. 매쉬> 버스> 컴뱃!>
<매쉬> 에서부터 그의 흥행 패턴이 시작되는데, 한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높은 평판과 갈채를 받은 다음에 한참 동안은 흥행에서 실패하는 작품들을 주로 저예산과 짧은 제작 기간 동안 만들어나가는 게 바로 그것이다. <내쉬빌> (1975), <플레이어> (1992), <숏컷> (1993), <고스포드 파크> (2001) 등 대표작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대충 준비된 각본을 가지고 배우들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연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즉흥적으로 연출했다. 고스포드> 숏컷> 플레이어> 내쉬빌> 매쉬>
그래서 그의 연출 스타일에는 ‘앙상블 영화’ ‘인물 파노라마’ ‘에피소드식 구성’ 등과 같은 말들이 붙으며, <내쉬빌> 에서는 출연 배우들이 자기가 부를 노래를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및 쇼 비즈니스의 여러 면모를 주로 비판적인 시각을 통해 보여주었는데, <내쉬빌> (컨트리뮤직),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미국 19세기의 와일드 웨스턴 쇼ㆍ1976), <플레이어> (할리우드 영화산업), <프레타 포르테> (파리 패션산업ㆍ1994), <캔사스시> (재즈ㆍ1996), <프레리 홈 컴패니언> (컨트리 뮤직의 라디오 생방송 쇼)이 그것이다. 프레리> 캔사스시> 프레타> 플레이어> 버팔로> 내쉬빌> 내쉬빌>
그밖에도 그는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인 <카운트다운> (1968), 종래와는 전혀 다른 서부극인 <맥케이브와 밀러부인> (1971), 유명한 만화를 각색한 <포파이> (1980), 고흐의 삶을 비틀어서 풍자한 <빈센트와 테오> (1990) 등 다양한 장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펼쳐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는 폴 토마스 앤더슨( <매그놀리아> )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21그램>) 등이 있다. 알트만이 1988년에 연출한 TV 미니시리즈 <태너 ’88> 의 다큐멘터리적 스타일은 나중에 TV 시리즈 등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태너> 매그놀리아> 빈센트와> 포파이> 맥케이브와> 카운트다운>
그는 다섯 번에 걸쳐 오스카 감독상에 지명되었지만 정작 상을 타지는 못했고, 단지 2005년에 공로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는 할리우드 주류영화의 관습과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평생 동안 그에 맞서서 자기만의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 온 우상파괴적인 반역자인 것이다. 바로 그런 덕에,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현대 미국에 대한 알레고리가 될 수 있었다.
이재현(이하 현) <매쉬> 를 십 몇 년 전쯤에 비디오로 처음 보았을 때 매우 분개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처럼 묘사되었더군요. 한국과 베트남을 구분하지 못하다니 진보적인 감독이 겨우 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매쉬>
알트만 지금은?
현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 메시지가 선구적으로 들어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참을 만하지요, 이제.
알트만 내 마지막 작품은 어떻게 보았는가?
현 밋밋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것도 감독님 평소 지론대로 두 번씩이나요. 두 번째 보기 전에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위대한 개츠비> 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미네소타의 주도 세인트폴 출신이더군요. 장소가 좁아서 나중에 다른 데로 옮겼지만 이 작품의 최초 로케는 세인트폴의 피츠제럴드 극장이라고 하더군요. 위대한>
알트만 포크록 가수 밥 딜런과, 영화 <피셔킹> 과 <브라질> 을 만든 <몬티 파이돈> 그룹의 테리 길리엄 감독도 미네소타 출신이지. 화가 그랜트 우드가 아이오와 출신이고, 미주리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마크 트웨인이 있다네.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캐나다와의 국경 아래로 미네소타주, 아이오와주, 미주리주가 차례로 있네. 험하기로 소문난 미주리강은 노스다코다주와 사우스다코다주를 꿰뚫고 두 주의 주도인 비스마크와 피어를 지나서는, 네브래스카주와 캔사스주의 동쪽 주경계선을 따라서 오마하와 캔사스시를 지나서 남하하다가 미주리의 주도인 제퍼슨시티를 지나서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시시피강과 만난다네. 몬티> 브라질> 피셔킹>
이 지역이 미국의 심장부인 ‘대평원지대’라네. 노예해방 뒤에 아프로아메리칸들이 미시시피강을 따라서 하류의 델타 삼각지로부터 먹고 살기 위해 북쪽으로, 즉 미국의 중부와 오대호 부근, 그리고 중동부의 대도시들로 진출하게 되었지. 그 진출의 역사가 바로 시골 음악 장르였던 재즈와 블루스가 분화하고 발전하는 역사야. 이 작품 말고도 내 영화 <내쉬빌>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캔사스시> 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역사지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이 깔린 작품들이지. 영화를 여러 번 보게 되면 자연스레 이런 배경이 이해될 거야. 캔사스시> 버팔로> 내쉬빌>
현 네에, 그렇군요. <프레리 홈 컴패니언> 의 마지막 장면에서 출연자들이 공개 라디오 방송 쇼를 마치면서 미국 민요인 를 부르더군요. 한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노래라서 반가웠지요. 원래는 캐나다 민요라면서요? 아무튼 미국 ‘뽕짝’인 컨트리뮤직을 그렇게 영화에서 정겹게 다룰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프레리 홈 컴패니언> 에는 저승사자 역할을 하는 천사가 나오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예감하셨는지요? 프레리> 프레리>
알트만 그래서 그 작품을 찍을 때 백업 감독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을 세워 두기도 했었네. 다행히도 내가 다 마칠 수 있었지만 말이야. 지금 돌이켜 보면 말이야, 나는 B-24 폭격기 조종사 훈련을 캘리포니아에서 받았는데 밤의 상공을 날면서 할리우드의 밝은 불빛을 보면서 할리우드를 그리워하곤 했지. 제대한 직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연기, 각본 집필, 연출 등을 시작했어. 캔사스시의 산업영화 회사에 취직하기 바로 전이니까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네.
현 하지만, 할리우드는 감독님을 계속 내쳐 오지 않았습니까?
알트만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복수하는 법이니까, 예컨대, <플레이어> 말일세. 또 <숏컷> 으로 L.A. 사람들의 허망하고도 황폐한 삶을 보여주기도 했으니까, 나로서는 충분히 반격을 했다고 할 수 있다네. 숏컷> 플레이어>
현 감독님께서는 부시가 재선되면 미국을 떠날 거라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는데요….
알트만 아무튼 지금은 부시가 망했으니까 다행이야.
현 이건 사적인 질문인데요, 감독님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알트만 어쨌거나 나는 일할 때는 마시지 않는다네, 다만 마실 때 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
현 (푸훗) 저희 한국 사람은 그런 미국식 유머에는 약하답니다. 그런데 장수하신 비결이 뭐지요? 게다가 단지 오래 사신 것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작품을 찍어 오셨는데요.
알트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 또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려는 의지가 중요해. 그리고 터무니없이 짧고 굵게 살려고 하기보다는 가늘고 길게 살려고 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뭐라 하든 거기에 연연해 하지 말고 자기만의 길을 가려는 투지가 필요하지. <프레리 홈 컴패니언> 에는 텍사스 출신의 냉정하고도 탐욕스러운 사나이 역으로 토미 리 존스가 나오지 않나? 세상에는 바로 토미 리 존스 같은 사람이 많아. 그런데,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버텨내는 거야. 프레리>
현 토미 리 존스의 과묵하고 미니멀한 연기는 아주 좋았죠. 마지막으로 한국의 관객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알트만 스크린쿼터를 지키려는 한국 영화인과 관객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이곳 미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 열심히들 싸워주시고요, 그리고 너무 ‘대박 영화’만 즐기지 마시고 저예산 독립 영화와 예술 영화에도 애정을 쏟아 주십시오. 감독과 배우와 스태프는 관객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든요.
현 감독님, 이 세상일일랑 저희들에게 맡겨 주시고 이제는 편히 쉬세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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