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 어김없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슬쩍 운을 띄우고 올들어 여기저기서 거들더니, 얼마 전 열린우리당이 정색하고 개헌론을 들고 나왔다.
내용이 어떻든 헌법에 손을 댄다는 것은 워낙 폭발력 큰 사안이라 대개는 정치판도 변화를 꾀하는 세불리(勢不利) 측에서 제기하기 마련이다. 여당의 개헌 주장도 정개개편론과 맞물려 저의가 읽힌다. 완연한 우위에 있는 한나라당이 호응할 리 만무하므로 매번 그랬듯 개헌은 또 공론(空論)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파별 득실을 떠나 이번 개헌론을 대하는 심정은 전과 다르다. 처음으로 필요성이 절실히 와 닿는다는 말이다. 이는 '87년 체제의 극복'이니 '민주화의 제도적 완성'이니 하는 자못 거창한 명분들과는 별 관련이 없다.
경험에서 비롯된, 온전한 현실적 동기에 따른 것이다. 겪어 보니, 대통령으로 뽑은 다음엔 국민이 어쩌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서 핵심은 '대통령 4년 중임제'로의 개헌이다.
선거란 '이기는 것이 최상의 미덕'인 게임이므로 적절한 지도자를 고르는 방식으론 한계가 있다. 좋은 건 죄다 쓸어 담은 공약을 기준으로 후보를 판단하는 것도 부질없다.
노 대통령의 공약 이행률이 8%에 불과하다는 야당의원의 가혹한 평가도 있으나 전 대통령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선거는 순간 바람몰이가 유난하므로 뒤늦게 자질과 능력, 정책방향 등을 깨닫고 후회할 가능성은 더 많다.
● 5년 단임제는 대통령 무책임제
단 한번 5년 임기가 보장된 현 제도에선 대통령도 소심할 이유가 없다. 여론이 어떻든 뜻 맞는 몇몇과 더불어 마음먹은 대로 일로매진하면 될 터이고, 평가야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저 훗날의 역사에나 떠넘기면 그만이다. "못해 먹겠다"고 투정을 부린들, 급기야 국민 열에 아홉으로부터 외면 받게 된들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자신의 방식을 애써 수정할 필요도 없다.
전임과 현 대통령이 공언(空言)한 중간평가, 재신임에 탄핵도 있으나 이는 위험한 헌정중단 상황을 의미하므로 웬만큼 간 큰 국민이 아니고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통령 평가수단은 재임기간을 줄인 중임제 밖에는 없다. 5년 단임제는 20년 전 국민 의사에 반하는 장기집권을 막으려 채택된 절충안이지만 높아진 국민의식이나 인터넷 등에 의한 중층적 감시체계가 촘촘한 지금 이런 걱정은 치워 두어도 괜찮다.
5년 단임이나 4년 중임의 집권 2기나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자는 실제 국가운영 능력에 대한 평가를 거쳤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개헌을 공약한 차기 대통령에게 맡기자는 의견도 있으나 전례들에서 보듯 이건 하지 말자는 얘기다. 어느 순정한 정치인이 있어 어렵게 집권한 마당에 제 임기를 줄이고 정쟁의 단초나 줄 일을 하려 들까. 그러니 때는 지금이 적당하다.
실제로 4년 중임 개헌제안을 수 년 전 꺼낸 쪽은 한나라당이니 이제 와 죽어라고 반대하기도 어색하다. 마침 헌법학자들도 대통령 임기조항의 수정을 제안하고 나선 마당이다.
● 이번엔 대통령 임기 조항만
사실 우리 헌법에는 표방하는 원칙과 현실운용이 괴리된 조항들이 적지 않다. 또 다른 영역이어서 짧은 글에서 논하긴 적절치 않으나 이걸 다 상 위에 올리면 또 한번 격렬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추후 국내외 환경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옳다. 여당 일방의 제안과 흡사해 걸리긴 하지만, 다른 논의는 배제하고 여야 모두 국가운영에 마땅한 책임을 진다는 자세로 대통령 임기조항만 손을 대는 조건에 동의한다면 큰 파장 없이도 개헌이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을 겪어 본 뒤에야 고작 "영도다리 아래 잘라버린 (표 찍은) 엄지손가락들이 둥둥 떠다닌다"는 둥, "찍은 게 남부끄러워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둥 자학적 농담으로나 위로 삼을 일이 아니다. 먼 역사가 아니라 당장 국민이 평가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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