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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김밥천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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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김밥천국 이야기

입력
2006.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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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지 김밥천국의 불빛이 한국의 밤을 밝히고 있다. '김밥천국'이라는 놀라운 이름을 처음 생각해낸 이가 상호(商號) 등기에 무심한 카피레프티스트였던지, 이 이름을 앞세운 체인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도 여럿 올라 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김밥천국이 보통명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24시간 문을 열어놓는 간이음식점이라는 뜻의. 아무튼, 하루 24시간 음식을 파는 식당 체인이라니. 한국 말고 다른 곳에도 이런 게 있을까 싶다. 24시간 편의점의 본적지가 미국인지 일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나라들에도 24시간 음식점 체인은 없을 것 같다.

● 송구스러운 '24시간 연중무휴'

나처럼 자고 깨는 게 제멋대로인 '자유노동자'에겐 김밥천국만큼 고마운 게 없다. 남들 다 잘 시간에 부스스 일어나 정신을 차리면, 이내 속이 출출하다. 내 나이 또래의 평균 한국남자들처럼, 나 역시 뭘 차려먹는데 치명적으로 무능하다.

그렇다고 밤마다 새벽마다 아내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가 걱정이랴, 김밥천국이 있는데. 나는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김밥천국으로 간다. 낯익은 아주머니들이 반긴다. 텔레비전 채널은, 늘 그렇듯, YTN에 맞춰져 있다.

나는 정수기에 컵을 대고 물을 따른 뒤(김밥천국에서 물은 셀프서비스다), 순두부백반을 주문한다. 김밥천국 아주머니의 말을 흉내내, 나는 "수니 하나요!"라고 외친다. 5분도 안 돼, 순두부찌개가 식탁 위에서 보글거린다.

김밥천국의 가장 큰 매력은 24시간 연중무휴라는 점이다. 추석과 설 당일만 빼고 말이다. 심지어 추석과 설에도 반나절은 열려있을 때가 있다. 아주머니들이 차례만 지내고 나오는 것 같다. 몇 교대로 일을 나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들에게선 삶의 엄중함이 느껴진다. 때로, 내가 그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아닌가 송구스럽다.

그런 거북한 마음이 이분들의 연중무휴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김밥천국의 또 다른 매력 두 가지가 이런 송구스러움을 강요한다. 하나는 메뉴가 너무 다채롭다는 것이다. 김밥류만이 아니라 분식류, 찌개류, 덮밥류, 국밥류, 죽류 등 온갖 음식이 김밥천국의 차림표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우리 동네의 내 단골 김밥천국 차림표에서 음식 가짓수를 헤아려보았더니, 물경 99종이다. 이 많은 종류의 음식을 김밥천국 아주머니들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게 만들어낸다(그래도 고객에겐 섬세한 실천이 요구된다.

김밥천국 음식들의 조리법이 표준화돼 있다 하더라도, 가게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단골 김밥천국의 '개인기'와 '취약메뉴'를 파악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김밥천국의 음식값이 비교적 헐하다는 것이다. 흔히 원조김밥이라 부르는 기본형 김밥은 1,000원이다. 찌개류도 3,000원대다.

이 다양한 메뉴의 음식을 싼값에 팔아 이익을 내야 하는 김밥천국 경영자도, 나처럼, 김밥천국 아주머니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을지 모른다, 고 나는 잠시 상상한다.

그래도, 김밥천국의 다양하고 저렴한 음식은 그 자체로 미덕이다. 다만, 밥값이 싸다는 것과 무관치 않겠으나, 김치가 너무 맛없다는 점이 흠이다. 김밥천국의 김치는 김치라기보다 그저 푸성귀 절임에 가깝다. 그러나 김밥천국 애용자라 해서 삼시 세 끼 김밥천국 김치만 먹지는 않을 테니, 더러 그런 엉성한 김치를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김치 귀한 걸 깨닫게 될 기회다.

● 직원ㆍ손님들에게서 삶의 애환이

여느 음식점에 견주어 김밥천국엔 젊은이들이 많다. 앞서 말한 김밥천국의 매력, 다시 말해 메뉴의 다채로움과 밥값의 상대적 저렴함 때문일 테다. 허름한 옷차림의 비정규직 타입이나 짙은 피부색의 이주노동자들을 김밥천국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들이 삶에서 겪는 애환은 김밥천국 아주머니들의 애환과 겹칠 것이다. 노동다운 노동을 해본 바 없이 허릅숭이로 살아온 나는 문득 그들 사이에서 어색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두부는 행복의 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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