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지리 부도에서 본 한국은 작았다. 거대 소련과 중공 옆에서 더더욱 작았다. 그나마 무기 재료로 쓰인다는 텅스텐 매장량 세계 몇 위가 위안이었다.
우리 음악도 작았다. 선율 위주의 가곡이 우리 음악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의 설움을 똑같이 받았음에도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같은, 시대적 아픔을 넘는 웅지의 관현악곡도 없었다. 돌아서서 <울 밑에 선 봉선화> 처럼 훌쩍였다. 울> 핀란디아>
● 왜 한국은 대작을 낳지 못하나
아버님은 평양에서 들은 소련인들에 의한 <스탈린 칸타타>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들이 들려준 불협화음은 대포 이상의 강력한 화력으로 아버님을 압도했다. 이후 당신의 합창 판단 기준은 언제나 이 작품이었으며, 그 기준으로 우리는 늘 허약했다. 스탈린>
사람들은 묻는다. "왜 교향악 축제에서 창작곡은 음악회 첫 곡으로만 연주되지 주 레퍼토리가 못되느냐? 메인 디시가 아닌 애피타이저 아니냐? 그러고 보니 한국 작곡가들은 가곡과 실내악곡만 발표하는 것 같다. 오케스트라를 모르는 것 아니냐?" 정녕 소위 대작, 명작은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없다면 작곡가 탓일까?
대작이 선보이려면 초연을 잘 감당할 연주집단을 만나야 하고, 많은 사람과 시간이 요하는 제작 과정과 이를 감당할 재정이 필요하다. 이후 홍보와 마케팅…. 원래 작곡은 개인사이지만 실현 과정 대부분은 후원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다. 과거 서양에서는 왕실이나 귀족, 교회가 이 일을 맡았다.
18, 19세기 도시 발전에 따라 공연시장이 형성되고 음악 규모가 커지면서 극장이나 흥행업자, 필하모닉협회와 같은 시스템이 등장했다. 지금도 대작은 오페라극장, 음악제, 연주장, 재단 등을 통해 만들어진다. 위촉에서부터 제작, 공연, 사후 관리까지 안정된 시스템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지속적이며 완성도 높은 대작이 가능하다.
런던 방문 중 헨델의 <메시아> 를 본 하이든은 음악 내용보다 900명 가까운 연주 규모에 놀랐다. 그간 그의 연주 규모는 기껏 20~30명에 불과했다. 더블린 필하모닉협회 위촉에 의한 <메시아> 는 하이든처럼 한 귀족의 후원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하이든은 귀족 후원 그룹의 도움으로 대작 <천지창조> 를 발표했다. 천지창조> 메시아> 메시아>
● 종교ㆍ기업 등 사회시스템이 받쳐줘야
급성장한 우리 사회의 내부 시스템들은 그 규모에 비해 문화적 생산 기능은 매우 약하다. 이에는 앞서 언급한 문화계 시스템만이 아니라 종교계, 기업, 교육 등 제 분야가 해당된다.
인류사에 있어 대작의 산실이었던 종교. 현재 우리 종교계의 문화 생산 기능은 어떠한가? 교회와 사찰이 우리 사회에 남길 음악 유산은 무엇일까? 무분별한 외래문화 도입과 열린음악회 류의 산사음악회로 답할 것인가?
사회 시스템이 큰 차원의 생각을 가질 때 우리 문화의 힘은 커질 것이다. 국가의 문예진흥정책도 나눠주기 식이 아닌 대작 발굴과 육성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교향악 축제 메인 디시로서 창작곡을 선택하려는 용기, 아니 그 전에 곡을 찾으려는 생각, 아니면 만들게 하려는 생각. 이것이 우리가 필요한 지금의 큰 생각이다.
황성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ㆍ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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