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일찍 배울수록 잘한다는 속설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왔다.
신경과학·심리학·교육학자들이 모인 마음·두뇌·교육협회가 18일 서울 동덕여대 춘강홀에서 개최한 심포지엄 ‘영어교육, 언제 그리고 어떻게’에서 발표자들은 ‘과연 언제부터 영어를 배워야 하느냐’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영어는 사춘기 이전에 배워야 한다’는 가설을 받아들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남기춘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모국어와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자에 대한 뇌 연구 결과를 통해 “과거 외국어를 일찍 배운 경우와 늦게 배운 경우 뇌 사용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져 영어조기교육의 근거가 됐지만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했다.
보통 외국어를 말할 때는 모국어를 말할 때와 달리 우뇌의 많은 부분이 바삐 돌아간다. 반면 조기학습자는 외국어를 말할 때도 모국어를 말할 때와 같은 뇌를 쓴다. 그만큼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외국어를 학습한 시기와 상관없이 능숙도가 높아지면 외국어 뇌 영역이 모국어 뇌 영역과 일치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남 교수는 “늦게 외국어를 배우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모국어를 쓰는 사람처럼 뇌를 쓴다는 것”이라며 “조기 학습자와 후기 학습자의 뇌 사용의 차이는 능숙도의 차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를 넘기면 원어민처럼 말할 수 없다는 가설을 영어교육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분별하다”고 말했다. 모국어를 배울 때처럼 하루 10시간쯤 노출되는 환경이 아니라면 ‘시기’가 중요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미국 이민자를 대상으로 이민 온 나이와 영어 능숙도의 관계를 따진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한 연구자는 한국계·중국계 미국인을 연구한 결과, 16세 이후 이민 온 사람들의 영어 능숙도가 급격히 하락, 16세가 영어 습득의 분기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최근 똑 같은 방법으로 스페인계 미국인을 연구했을 때 영어 능숙도는 뚜렷한 분기점 없이 완만히 떨어져 ‘결정적 시기’가 따로 없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 교수는 “이민자들의 모국어에 따라 차이가 난 것은 두 사회의 교류와 친밀도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며 “결국 ‘결정적 시기’가 무조건적이라기보다 적용되는 조건이 따로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경민 서울대 의대 교수는 “뇌 신경발달 단계로 보면 언어영역의 잠재력이 가장 높은 시기(시냅스가 가장 많이 생기는 시기)는 7~10세이지만, 언어학습이 효과적이려면 계획을 세우고 동기를 부여하는 또 다른 기능인 ‘집행기능’이 결부돼야 한다”고 말했다.
뇌의 집행기능은 전두엽의 역할인데, 전두엽은 훨씬 천천히 성숙한다. 같은 대학 서유헌 교수도 “언어학습과 관련된 뇌 부위는 아주 다양하고 발달시기가 서로 다르다”며 “뇌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 전 무리한 조기교육을 할 경우 이는 학습이 아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명희 전국유아현장연구부회장은 “올 1월 초등학교 1학년 영어교육 도입이 발표된 후 모든 유치원이 준(準) 영어유치원이 되고 있다”며 조기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지적했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